1947년 중국 군사재판부는 중국인들을 생매장한 혐의로 기소된 일본군 요네무리 하루키와 고문, 강간, 약탈의 혐의로 기소된 시모토 지로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6개월 뒤 이들은 상하이 남경로에 내몰려 끌려다니다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 이것이 일본 전범에 대한 첫 공식 처형이었다. 상하이 주재 영국 총영사 A.G.N.오그든은 난징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 공개 처형이 잔혹하고 후진적이라고 지적하며 상하이의 외국신문들이 "중국 당국이 아직도 그런 (공개처형) 절차를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고 비난한 사실도 보고했다. 또 중국이 적들을 다루는 과정이 '이중잣대' 적이라고도 비판하였다. "중국 당국이 일본인 전범들과 중국인 '변절자들' 을 대하는 무자비한 태도와, 이곳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독일인들을 대하는 느긋한 모습을 비교하면 아주 재미있다. 독일인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함께 갈 수 없는 처지이지만 전후 협상에서 그들의 존재가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해 추방하지 않은 것이다"


오그든의 보고서는 런던으로 보내졌다. 외무부 전쟁범죄국의 프레더릭 가너가 이를 두고 중국의 행동을 비판하는 오그든의 태도에 이종차별적인 저의가 있음을 간파한 듯 날카롭게 반박했다.

"사실 중국은 일본 전범들에게 아주 온건한 편이었다. 그들이 저지를 엄청난 범죄에 비하면 처형자의 수는 지극히 적다. 중국은 많은 사람을 몰래 처형하기보다, 몇몇 극악한 범죄자를 대중 앞에서 단죄함으로써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것이 유럽의 많은 나라보다 더 혐오스러운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그들이 더 훌륭하게 처신했다고 본다. UN 전쟁범죄위원회의 태평양 소위원회는 이미 3월에 활동을 종료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그 모체를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중국이 이용가치가 있는 독일인들을 자신의 나라에 머물게 하는 것을 비난한다면, 미국에 있는 독일의 로켓 과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그 사이 연합국은 도쿄에서 일본 전범 중 정치와 군사 쪽 고위 관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큰 전후재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중잣대의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1946년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 그리고 비인도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소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Far East 가 설치되었다. 법정의 설치강령, 임명권, 기소권은 모두 미국의 손에 있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점령군 사령부가 관장했다. 판사석은 연합국측 11개국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소련, 중국, 인도, 네덜란드, 필리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이 선임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법관 윌리엄 웹 경이 재판장을 맡았고 소추위원회는 미국인 변호사 조지프 키넌이 이끌었다. 도쿄 법정도 뉘른베르크처럼 죄인들을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법과 평화를 앙양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 교훈을 남기고, 일본인들의 눈앞에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맥아더는 특히 일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공개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도쿄 지역 신문 발행인들에게 "전면을 할애해서라도 재판을 심층취재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이 대개 타블로이드 판 한 장 분량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판사들은 거대한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청객들이 "얼핏 보기에도 너무 높아 보였다" 고 할 정도였다. 모두가 정치적 배려에 따라 그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었는데, 캐나다 판사는 워싱턴과 오타와 간에 다른 전범재판을 놓고 이루어진 거래의 덕을 입었다. 인도 판사는 영국측에서 프랑스나 네덜란드보다 인도가 더 고통을 받았다고 고집한 바람에 결정된 경우였다. 영국이 인도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건네준 선물이었던 셈이다. 필리핀 판사는 자기네 나라도 인도만큼이나 고통받았다고 주장해 자리를 챙겼다.

피고측 변호인단(28명의 일본인 변호사와 2명의 미국인 변호사)은 곧 판사들의 신뢰성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미국인 변호사 조지 퍼네스는 "이 판사들은 일본을 패망시키고 재판에 회부한 당사국들의 대표이므로 피고들에게 적법하고 공정한 재판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고 주장했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과학자들이 화성에 갈 수 있는 우주선을 완성하고, 그곳에서 중립적인 나라와 국민들을 찾아내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재판을 치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라고 받아쳤다.

변호인단은 몇몇 판사들이 도저히 재판을 관장할 수 없는 부적합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고삐를 조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인 윌리엄 웹은 1943~44년 일본군이 호주군에 저지른 잔학행위를 조사한 적이 있었으며, 소련의 I.M.차라야노프 소장은 법정의 공식 통용어인 일본어와 영어를 하지 못했고, 필리핀의 델핀 자라닐라는 일본군에 붙들려 전쟁포로로 수감된 적이 있었던 전력이 피고들에게 적대적일 것이라는 점을 문제삼은 것이다.

소추위원회는 1928년의 사건까지 거슬러올라가 조사한 55개의 '반평화 범죄' 중 36개 죄목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입증했다. 도쿄 재판의 경우 체포된 전범 용의가 9168명 가운데 A급 전범 46명은 동경에서, B급과 C급 용의자 6676명은 피해 당사국에서 재판을 치렀고, 2846명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조지프 키넌은 기소 요지 낭독에서 '문명에 도전한 전쟁' 에 다름 아니었던 일본의 야만적 행태를 비난했다.

"그들은 기소장에 수없이 열거된 것처럼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침략전쟁을 모의하고, 준비하고, 개시했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인간을 하찮은 소모품처럼 다루었습니다. 이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억압하고 노예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소추위원회가 침략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뉘르베르크 재판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연합국은 '반평화 범죄'라는 것이 국제법상의 근거가 미약하고 법조계에서도 이를 입증하는 데 회의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런던에서 외무부 법률보좌관 에릭 베켓은 도쿄 재판에서 '반평화 범죄' 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쿄 재판에서 이 논점에 대한 방어 논리를 깨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이 어쨌든 어느 정도 악법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말은 연합국이 곧 '법이 없으면 처벌도 없다 nulla poena sine lege' 전제를 위반했다는 의미였다.

소추위원회는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일본이 지난 18년간 펼쳐온 외교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피고들을 다그쳐 전시정책의 범죄성을 억지로 인정하게 하려 한 것은 서투른 처사였다. 도조 히데키 전 수상은 침략을 꾸짖는 키넌의 분노에 찬 추궁을 쉽게 받아넘겼다.

키넌: 도조 씨,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범죄라는 데 동의합니까? 간단히 질문하죠. 전쟁은 반인간적 범죄라는 데 동의합니까?

도조: 전쟁이 범죄라는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승자든 패자든 인간에게 불행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면 동의하겠습니다.


그동안 변호인단은 일본의 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확산 야욕에 대항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뿐이라며 침략 혐의를 부인하려 애썼다. 실제 소련과 중국이 확장정책을 구사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 공산주의 봉쇄 선언을 발표한 1947년 3월 12일 이후였다. 그리스와 터키가 소련의 패권확장에 맞서 싸우고 있다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 지원을 요청했던 시기만 해도 이미 전쟁이 끝난 뒤였다. 그런 만큼 변호인단의 주장에는 시기상 모순이 있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는 냉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웹 재판장은 변호인단이 냉전논리를 끌어들이는 것을 막으려 안간힘을 섰다.

1947년 4월 피고측 변호인 조지 래저러스는 "일본이 중국에서 행한 일들은 모두 공산주의 확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유 있는 공포' 였다."

"우리가 보기에 트루먼 대통령이 말한 것은 그동안 일본이 말해왔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시기상으로 약간의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은 1937년 중국 사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예견했던 것을 입증하는 자료로 손색이 없습니다" 

웹 재판장은 법정에서 연합국의 일원, 특히 소련을 비방하는 소리를 묵과하지 않겠노라 선언하면서 이 말을 비판했다.

"미국인 변호사로서 연합국의 법정이 베푼 크나큰 관용을 악용해 분별없이 적의 편에 서서 악의에 찬 선동을 퍼뜨리는 우를 범하지 마시오"

래저러스는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우리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말이 적의 선동으로 불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웹 재판장은 래저러스 변호사와 충돌한 직후 변호인단이 모인 자리에서 "당신들의 언사를 볼 때 일본의 선동가나 다름없다" 며 성토했다. 피고측이 만주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소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려 하자, 재판부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된 문서들을 모두 기각해버렸다. 이 점에서 도쿄 재판소는 워싱턴의 전적인 지지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의 '반공산주의 십자군' 에 등을 돌린 유일한 기구였다.


'반평화' 죄목은 도쿄 법정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는 '침략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지구촌을 1940년대 후반의 '현 상태 status quo' 대로 굳히려는 의도가 숨이 있었다. 뉘른베르크의 수석 검사 로버트 잭슨은 '어떤 나라가 무슨 불평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침략전쟁은 불만을 해결하거나 그런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합법적인 수단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었다. 다시 말해,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재판헌장에 입각할 경우, 당시 아시아의 화두였던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은 금지된 것이었다. 전쟁 또는 이른바 '무력을 통한 자위'가 금지되었고, 식민지들은 순순히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의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어떤 경우라도 평화에 대한 그런 안이한 인식은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 '현 상태'라는 것은 피지배국이 평화의 이름으로 영원한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이라고 역설했다.

식민지 문제는 재판소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시아와 태평양 국가들은 아직도 백인 식민지 열강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는 재판 후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연합국은 한편에서는 침략적인 외교정책을 들어 일본을 소추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들을 무례하게 팔꿈치로 밀어제치며 이미 체결되어 있던 식민지 협약을 멋대로 어기고 있었다.

일본을 고소하기 위해 나선 당사자는 중국과 필리핀을 제외하면 식민지였던 나라들(한국, 포르모사, 만주)도, 일본에 점령되거나 그들과 싸웠던 나라들(말레이시아, 동인도 제도, 버마, 뉴기니 등) 도 아니었다. 사실 이런 나라 중 그 어디도 참가초청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때문에 지배권에 방해를 받았던 식민지 열강(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호주)이 도쿄 재판소에 나타나 일본을 꾸짖고 있었다. 미국측 검사 솔리스 호로비츠는 일본이 꼭두각시 정권을 앞세워 중국을 강탈했다고 고발했다.

 "일본 관리들이 핵심 요직에 기용되고, 경제체제를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일본의 보호와 감독 하에 국책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입의 일정 부분을 강압적으로 은행에 예치하도록 만들었으면서도, 은행의 이권은 일본인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일본 이주민들이 땅을 몰수하고 약탈하는 사이 중국 농부들은 황무지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18세에서 45세까지 중국인들은 모두 일본군에 들어가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중국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중국의 자원과 부는 약탈당하고, 파괴당하고, 고갈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후 한 중국 교수는 도쿄 전범재판에 관한 세미나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중국을 가장 먼저 약탈한 사람들은 영국인들이었다. 그러나 도쿄 재판에서 영국은 심판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쳐들어왔고, 프랑스가 밀고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미국이 남은 것을 챙겼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모두 똑 같은 도둑이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유럽인들이 일본의 철수를 도우면서 다시 지배권을 회복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총독부가 전쟁기간 동안 100만여 명이 기근으로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비축식량을 약탈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 일본은 1944년 이곳에서 프랑스를 축출했다. 1945년 8월 파리의 특사들이 하노이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반겨준 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죽음을" 이라고 외치는 폭력 시위대였고, 이를 제지해준 것은 일본군이었다. 그 다음 달 미국 전쟁범죄조사단이 악명 높은 일본 헌병대 요원을 체포하러 사이공에 도착했다. 하지만 조사단은 영국, 프랑스, 인도 점령군이 공동의 적인 월맹과의 싸움을 위해 그 요원들에게 다시 총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획을 연기했다.

 

도쿄 재판은 법정에 선 전범들의 면면만큼이나 끝까지 소환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의혹으로 유명한 재판이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수상쩍은 사람이 바로 히로히토 일왕이었다. 각료 중 일곱 명이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는 한번도 소환을 당하지 않았다. 처음에 미국은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정치 고문관이었던 조지 애치슨은 히로히토가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6년 1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일왕은 틀림없는 전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 점령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왕을 쓰러뜨리면 나라가 분열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정말로 히로히토가 혼돈을 막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다. 아니면 그 옥좌를 자신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과 동일시했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일왕은 맥아더가 이끄는 함선의 허수아비 선장이 되어 피고석 출두를 면제받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히로히토가 명목상의 왕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 기간 동안 일왕은 왕궁에 격리된 채 나비 채집으로 소일했고, 군대가 일을 꾸미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일왕을 '완벽한 찰리 맥카시 Charlie McCarthy (복화술사가 조종하는 인형)' 로 묘사했다. 한편 법정 안에서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연합국이 히로히토에게 죄를 떠넘기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썼다. 한번은 미국 관리가 피고측의 조지 래저러스 변호사에게 형무소에 수감 중인 군 관련 피고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이 때 그는 이들 피고의 증언 시 처신 요령과 아울러, 히로히토가 의전상 참석해야 하는 회의에서 군사 작전과 계획이 논의되었을 때 그의 참석은 단지 상징적인 의례였을 뿐임을 치밀하게 주입시켰다.

사실 일왕은 전시정책에 대해서만 개입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외교정책의 실행을 최종적으로 지시했고, 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고관을 가차없이 낙마시켰다. 프랑스측 검사 로베르 오네토의 말처럼, 일왕은 "그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도 거절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오네토는 "그의 재판 궐석은 기소에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피고들이 자신들의 혐의를 알게 모르게 일왕에게 돌리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도조 히데키에게 일왕의 의지를 거스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일본 국민, 특히 고위 정부관리라면 왕의 뜻에 반대하지 않을 것" 이라고 대답했다. 히로히토의 궐석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구태여 숨기지 않았던 윌리엄 웹은 판사석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다 "그래요, 저 대답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잘 알겠지요" 라고 빈정댔다.

1948년 1월 영국측 검사 아서 커민스 카는 법무부 장관 하틀리 쇼크로스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모두가 일왕에게 공공연히 충성심을 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왕이 유죄라는 실질적인 증거가 아닌가"

그가 진주만과 여러 지역의 공격을 승인해주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서방 언론은 좀더 비판적인 논조를 띠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는 히로히토의 양위를 요구했고 맨체스터 가디언은 그가 법정에 출두하지 않음으로써 재판에 '비탄스런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했다. 미국 외무부는 '일왕은 유죄를 피할 길이 없다' 고 전망하기도 했다. 몇 년 뒤 1950년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엄격히 법적으로' 히로히토가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 것은 일왕만이 아니었다. 전쟁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약탈행위들 역시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731부대의 세균전 의학실험에 대한 논의는 미국이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관리들과 사면의 대가로 연구자료를 제공받기로 밀약한 대가로 중지되었다. 중국인들이 겪었던 끔찍한 수난에 관한 문제 역시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에 자행한 전쟁범죄에 초점이 맞춰질 것을 우려했던 까닭에 제기되지 않았다.

 

열한 명의 판사는 전쟁유죄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편이 갈렸다. 도쿄 재판이 시작될 무렵에 종결된 뉘른베르크 재판과 비교되는 데도 매우 민감했다. 1947년 3월 뉴질랜드인 판사 하비 노스크로프트는 본국으로 절망적인 편지를 썼다.

"저는 이 긴 재판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법정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 다룬들 그것이 법에 부합하는 것인지 또는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를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법정이 심각하게 분열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국제법상으로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한발 한발 내디뎌온 그 모든 노력들이 허무하게 좌초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려는 본국으로 돌아간 서방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되었다. 영국의 전직 주 도쿄 대사였던 에슬러 데닝은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우리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해 서방이 전권을 장악한 재판소를 극동에 설치했다. 만약 도쿄 재판이 임무를 완수하는 데 실패할 경우, 서방의 정의는 일본뿐만 아니라 온 극동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도쿄에서 판사들은 윌리엄 웹 재판장이 재판부의 일원이 아니라 법정의 우두머리인양 행세하며 다혈질이고 난폭하다는 불만을 터뜨렸다. 뉴질랜드 수상 피터 프레이저는 수상 벤 치플리에게 그의 소환을 요청했고, 1947년 11월 웹 재판장은 결국 본국으로 소환되어 미국인 판사 마이런 크레이머가 새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소추위원회 역시 내부적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의 경우 영국측 검사 커민스 카는 그가 상습적 음주 때문에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할 지경이라고 자주 런던에 보고했다. 영국의 법무부 장관 하틀리 쇼크로스는 1948년 1월 키넌이 무능하기 이를 데 없고 술독에 빠져 지낸다고 대법관에게 보고했다. 한 영국 외교관은 그가 도조 히데키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도조의 재판은 박스오피스 최고 흥행작이었다. 적의 두목이 재판정에 나타났다는 상징적 장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방청석을 가득 메운 채 스타가 벌이는 스펙터클한 한판 승부에 만족했다. 도조의 빠른 두뇌회전, 명쾌한 답변, 카리스마, 그리고 상대(키넌)를 다루던 솜씨는 왜 도조가 일본의 전시 지도자였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도조의 변호인 키요세 이치로는 침략과 공모 혐의에 대해 250면에 달하는 진술서를 내놓았다. 그것의 핵심은 일본이 침략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단지 합법적인 국가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서방과의 갈등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도조는 이 재판을 통해 일전에 서투르게 자살을 시도한 데 실망했던 일본인들의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쿄 주재 영국 대사관은 본국으로 타전하는 전보에서 "끝까지 일왕을 보호하고자 한 충성스러운 모습 그리고 스스로를 패배의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친 도조의 행동은 일본 국민에게 안도감과 함께, 그기 '진정한 일본인답게' 고소인들에게 당당히 맞섰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변호인단의 재판 준비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피고들은 일본과 미국 변호사들에게 할당되었다. 미국인 변호사들은 나중에 맥아더로부터 부당하게 '악덕 변호사' 라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열성적으로 변호했다. 그러나 자금, 통역관, 조사원, 타자수, 사무직원 등 모든 여건이 열악했고, 증거와 증인을 조사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법정규칙은 모호할 때가 많았다. 증거와 절차를 다루는 전통적 규칙은 적용되지 않았고, 재판장은 검사가 이미 제기한 사안에 대해서만 질의하도록 증인신문을 제한했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과연 몇 명의 판사들이 참석하게 될 지도 예측할 수 없었고 어떤 증거가 채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결론을 얻어낼 수 없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짐에 따라 여론은, 특히 미국의 여론은 재판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이 뻔했다. "결국 시간은 피고의 편에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공방을 질질 끌어 형량을 낮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12일, 2년 6개월을 끌고 4만 8412면에 달하는 증언기록을 남긴 채 재판은 종결되었다. 법정은 일본 수장들의 전쟁범죄와 침략전쟁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일곱 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열여섯 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무죄로 석방된 피고는 아무도 없었다. 두 명의 피고는 미국 연방 대법원에 항고를 하려 했으나 연합국이 나서는 바람에 대법원은 그들의 재판을 다룰 권리가 없다고 결론지어버렸다. 그 동안 미국은 1945년 8월부터 수감되어 2차 공판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A급 전범들을 풀어주었다. 도쿄 재판은 누가 보아도 정치적 실패작이었다. 아무도 재판이 다시 열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판사들은 일본에게 전쟁의 죄를 묻는 문제에 대해 첨예한 입장차이를 보였다. 다수파는 재판부가 처벌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좀더 강경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소수파 중에서는 세 명의 판사가 판결문에 공식 반대한다는 입장을 각자 개진했고, 네 번째 소수파인 웹 재판장은 '별도 의견서' 를 제출했다. AP통신 프랭크 화이트에게 한 판사는 "재판부는 사형선고를 둘러싸고 사분오열되었다"고 전했다. 피고인 중 히로타 코키는 단 한 표 차이로 교수대에 보내졌다. 처형방법을 놓고도 의견이 갈렸는데 결국 총살 대신 교수형으로 정리되었다. 영국 공관은 "이는 일본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피고인들의 유죄판결도 석연치 않다는 의구심을 가지가 할 수 있다"고 했다.

웹 재판장은 "전쟁을 개시하고 종결짓는 과정에서 일왕이 담당한 결정적인 역할이 소추위원회가 제시한 증거들의 주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일왕이 소추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판단은 그들의 몫이었겠지만 영국 법정은 주모자란 으레 당연히 처벌을 면하게 마련임을 고려에 넣었을 것" 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런던 행정부는 웹이 영국 법정을 언급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고 맥아더 사령관은 "웹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반 히로히토 정서에 편승하고 있다" 고 비난했다.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자신의 주장을 장장 1235면에 걸친 대문서로 내놓았고, 나중에 원자폭탄 희생자와 참혹한 파괴현장을 담은 사진을 꾸며 캘커타에서 책으로 발간하면서 재판소의 권위를 부정하기까지 했다. 그는 "식민열강은 아시아 정부들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일본과 똑같거나 더 나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고 주장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폭격한 것은 제1,2차 세계대전 때 독일제국과 나치 지도차들이 수행한 작전들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만행이었다고"고 힐난했다.

이 인도 판사의 주장은 법순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도쿄식으로 법을 개정하는 데 반대하고 이미 존재하는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내 판단으로는 현재의 국제법에 제시된 규칙을 무시한 채 새로운 범죄를 정의하고, 그 법에 따라 죄인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은 승전국의 권한을 넘어서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소급입법을 혐오하는 한, 이것은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어떤 나라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이는 곧 국제법에 반해 권력을 함부로 침탈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다."

팔은 맹렬한 반공산주의자였으면서도 식민주의에 대한 강한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시아 민족주의는 당시 인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수년이 지난 뒤 네덜란드 판사 베르나르드 필링은 이렇게 회고했다.

"인도 판사는 작금의 식민지 현실에 가장 분개했다. 200년 전 유럽이 아시아를 정복한 뒤로 지금까지 지배권을 누리고,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일본의 전쟁, 그야말로 '아시아 민중을 위한 아시아' 라는 슬로건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 같았다. 그는 인도군에 입대해서 일본군과 함께 영국군에 대항해 싸우기도 했다. 그는 철두철미한 아시아인이었다."

실제로 관련 보고서들은 비록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인도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들이 희생되었지만, 인도 언론이나 대중은 팔이 재판에 대해 보여준 반대견해를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그들의 식민종주국 영국에 대한 반감이 더 컸음을 시사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앙리 베르나르 판사는 "나는 일본의 장성, 외교관, 정치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데 바쳐진 이 재판이 실로 우리가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 며 기독교적 관용을 호소했다. "인간의 목숨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냉혹하게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전쟁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폭력적인 수단이다. 전쟁의 승자는 누구든지 득을 보고, 아무도 그를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 브렌누스가 이야기했듯이 "패자는 비참하도다 Vae Victis"

도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세계의 정치지도는 바뀌고 있었다. 중국은 어느새 아시아에서 새로운 위협적 존재로 떠오르고 반면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반공산주의 동맹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어제의 적들 사이에 새로운 동맹관계가 맺어졌다. 1952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정을 끝냈지만 수감 중인 전범들은 여전히 마찰의 불씨였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의 고초에 감상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의 석방운동은 조금도 수세적이지 않았으며, 실제로 정부관리들이 주도하고 일본 왕실까지 나서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53년 한 영국 외교관은 캐나다 대사 초청 칵테일 파티에 참석했을 때 타카마츠 왕세자가 초청인사들을 붙들고 전범들의 석방을 강하게 요청했다고 보고했다.

영국 외무부는 전쟁포로수용소 생존자들의 의견에 동정적이었고, 도쿄 주재 대사관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대사관은 외무부의 일본 태평양국이 "전범 문제를 다루는 데 대사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시했다. 도쿄 대사 에슬러 데닝은 "정치적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본국 정부는 몇몇 영국인들의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데 연연하고 있다. 처벌을 당한 패자의 마음에는 우리의 적들에게 이용당할지 모를 불만이 자라나고 있다"고 불평했다.

도쿄 재판에 대한 역사의 판결은 데닝의 예언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이 재판은 흔히 '실패한 뉘른베르크'로 일컬어진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연합국의 단결력이 겉보기에 아직 완전했을 때 열렸지만, 도쿄는 그것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각국이 독립을 회복한 서구 유럽에서 열렸고, 도쿄는 아직도 각국이 자유를 부르짖고 있던 아시아에서 열렸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소추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갈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The Rise and Rise of Human Rights: Human Rights and Modern War - Kirsten Sellars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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