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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통합방법상의 갈등
유럽연합의 근본적 갈등은 통합을 추진하는 방법과 시각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주의자 confederalist 들은 외교, 내무, 사법, 사회, 정책 등에 관한 주권을 유지하면서 국가간 협력을 강화하는 완화된 형태의 동맹관계를 지지했다. 반면 프랑스 등 연방주의자 federalist 들은 주권이 국가와 분리될 수 없다는 논리도 구시대의 산물로서 전쟁방지를 위해서는 초국가적인 기구를 설치하여 국가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미국이나 독일의 각 주가 외교, 국방, 통화 등의 권한을 연방정부에 이양한 것과 같은 형태의 유럽통합을 주장하면서 의사결정도 다수결에 의한 신속한 결정을 주장했으나, 영국은 완화된 형태의 통합과 만장일치를 주장했다. 유럽연합은 연방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마스트리트히트조약 초안은 연방국가를 지향 federal goal 한다는 조항을 포함했으나, 영국의 반대로 회원국간 협조를 강화 ever closer Union 하는 문안으로 대체되었다.
미국의 독립 초기 (1791~88), 1815년 비엔나조약 이후 독일, 1874년 이전 스위스가 연합국가 confederal state 의 형태를 띠었다. 반면 연방국가 federal state 는 미국의 경우와 같이 중앙정부가 외교, 안보, 통화정책 등의 권한을 수행한다. 유럽연합을 회원국이 독자적인 법령체계를 갖추고 조약체결과 군대 및 조세권을 갖는 점에서 연합국가와 유사하나, 집행위원회도 독자적인 법령체계를 갖추고 조약체결과 통상, 농업, 사회정책 등 분야 정책결정권을 집행위원회에 양허하여 연방국가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
유럽통합 과정에서 갈등은 회원국 경제여건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 통합방법상의 이견, 국가간 이해관계 등이 얽혀서 일어나는데, 프랑스의 유럽담당 장관 라마루스는 "독일은 동구정책에만 관심이 있고, 스페인은 남방정책, 영국은 자유무역, 이탈리아는 구조조정기금에만 집착하며, 프랑스는 공동 국방정책만을 주장한다면 공동체는 어디로 가겠는가?" 라고 갈등의 요인을 설명했다.
2. 언어상의 갈등
유럽연합 27개국은 모두 23가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동시에 통역하기 위해서는 506가지의 조합이 나온다. 따라서 정상회의와 이사화 등 공식 회의에는 최소한 253명의 통역요원이 필요하며, 공식문서는 번역되는 과정에서 시간, 인력, 자원의 소모와 오류를 야기하기도 한다. 유럽연합 각 기관에 근무하는 인원 중 가장 많은 직종은 번역 및 통역사이며, 연간 번역비용만 8억유로 (약 1조원) 으로 전체 행정경비의 40%를 차지한다.
특히 핀란드어, 헝가리어, 에스토니아어 등 우랄 알타이 어족은 직접 번역이 어렵고, 핀란드어 -> 영어 -> 헝가리어 식으로 중역시 오역 가능성이 높아진다. 언어의 다양성은 단일통화 작용에도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유로(euro) 화의 표기도 슬로베니아는 evro, 라트비아는 eiro, 리투아니아는 euras, 몰타는 ewro 등으로 달리해 주도록 요구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의 주요 기구가 소재한 브뤼셀과 룩셈부르크가 불어권인 이점과 초기에 영국이 가입하지 않고 독일이 전쟁복구에 바쁜 틈을 이용하여 불어를 제 1 공용어로 확고히 했다. 집행위원회가 매일 실시하는 브리핑도 불어만을 사용했으나, 2,000명이 넘는 특파원들의 요청에 따라 95년부터 영어 통역이 허용되었다. 집행위원회의 인터넷 서비스는 영어를 주로 하였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모든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언어의 다양성은 유럽 확대에 최대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데, 프랑스는 공식 회의에서 불어, 영어, 독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 5개 언어만을 사용하도록 제안하였으나, 여타국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유럽연합은 언어교육에 중점을 두는데, 통합 교육훈련사업 Socrates 은 대학간 협력 Erasmus 과 일반학교간 교류활동을 지원하며 Comenius, 기술훈련 과정에서도 언어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3. 의사결정 절차상의 갈등
로마조약은 의사결정절차로 만장일치와 함께 다수결원칙을 규정하였으며, 점차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확대하도록 하였다. 1965.6 집행위원회는 공동농업정책에 따른 재정부담이 커지자 자체 세입원을 확대하고 유럽의회에 예산통제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대부분의 회원국이 지지하여 다수결의 정족수는 충족되었다. 그러나 드골 대통령이 국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65년 7월 자국 대표를 이사회로부터 철수하고 브뤼셀 주재 상주대표부도 철수해 버렸다.
당시 공동체 의장국인 프랑스가 브뤼셀을 떠나자 (empty chair) 이사회는 개최되지 못했고 공동체 기능은 마비되었다. 프랑스는 6개월 후인 1666년 1월 룩셈부르크에서 개최된 특별이사회에 다시 참석했는데, 개별 회원국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바로 표결하지 않고 일정기간 동안 조정절차를 거친 후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룩셈부르크타협 Luxembourg Compromise 을 채택했다.
룩셈부르크타협은 정치선언으로서 이사회의 결정에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94년 6월 그리스 코르푸에서 개최된 회원국 정상회의에서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의 회원국은 차기 집행위원장으로 벨기에의 드한느 Jean-Luc Dehaene 수상을 지지했으나 영국만은 자국 출신 브리탄 집행위원을 고집했다. 회의 말미에 브리탄위원은 후보를 사퇴했으나 영국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독일의 막후 절충을 거쳐 제 3의 인물인 상태 Jacques Santer 룩셈부르크 수상을 선임하였다.
룩셈부르크타협은 법적 기속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비토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82년 5월 각료이사회에서 영국은 농산물 가격결정이 국익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비토했다. 여타 회원국은 영국이 이미 공동농업정책에 합의했으므로 가격결정 자체가 중요 국익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해서 표결로 이어졌고, 영국의 반대와 덴마크, 그리스의 기권에도 불구하고 가결되었다.
4. 공동정책에서의 갈등
공동 외교안보정책은 만장일치로 결정되므로 보스니아 등 지역분쟁은 적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13개국 연합군을 결성하여 걸프전을 집행했다. 유럽연합은 이라크와 무역협정을 파기하고 석유수입을 중단하는 등 신속히 대응했으나, 군사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파병한 반면 벨기에는 무기판매도 거부했다. 이스켄 Mark Eyskens 벨기에 외무장관은 "유럽은 경제적 대국 giant 이나 정치적 난장이 dwarf 이고 군사적으로 벌레 worm 수준이다" 라고 평했다.
또한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을 때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덴마크, 네덜란드 등은 지지했으나 프랑스,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그리스 등은 적극 반대했다. 파월 미 국무장관은 유럽은 한 국가를 설득하면 다른 국가가 반대하는 현대판 히드라에 비유했다. Financial Times 지는 이라크 전쟁에서 최대 희생자는 유럽 Europe is the first casualty of war 라고 표현했다 (2003.3.12)
96년 3월 영국 정부가 광우병 mad cow disease: BSE 이 사람의 소해면상 뇌증 (CJD) 과 연관이 있다고 발표하자 유럽연합 회원국은 영국산 쇠고기와 제라틴, 화장품, 의약품 등 쇠고기를 사용한 제품의 수입을 금지했다. 영국은 수입금지는 단일시장 정신에 어긋난다고 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아울러 광우병에 걸린 4백만 두의 도살하는 비용 중 일부를 유럽연합이 지원하도록 요청하면서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안건을 모두 비토하여 정책이 표류했으나, 96년 6월 플로렌스 정상회의에서 850만 유로를 특별지원키로 하여 비토권을 해제했다.
5. 재정부담과 수혜율 간의 격차
회원국은 유럽연합에 가입하여 주권의 일부를 양허하는 대신 경제적 이득을 기대하고 있으나 국가별 소득수준과 재정규모가 상이하여 재정부담과 공동정책 수혜율 간에 괴리가 발생한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4개국이 전체 세입의 2/3을 부담하고 더구나 독일과 영국은 농산물 수입국으로서 공동농업정책에 따른 소비자의 고비용 지불이라는 이중부담까지 지고 있다. 반면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은 재정부담에 비해 수혜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특히 영국은 공동체 가입 초기 20%에 이르는 재정부담에 비해 수혜율은 10%에 불과했다. 또한 공동농업정책에 따라 높은 가격으로 농산물을 수입하면서 관세마저 공동세입으로 빼앗기게 되자 75년 6월 이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였으나 67%가 공동체 탈퇴에는 반대했다. 퐁텐블뤼 정상회의는 영국에 대해 세출 면에서 보상장치를 마련하고 부가가치세 부담과 수혜액의 차액 중 66%를 환불해 주기로 했다. 대처 수상의 강경노선은 영국 의회 내에 통합회의론을 증폭시켰는데, 노동당은 83년 선거공약으로 공동체 탈퇴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영국은 EU 예산의 46%가 유럽 인구의 5%에 불과한 농가에 지출되며, 그 중 20%는 프랑스에 배정된다고 주장하면서 농업보조금 축소를 주장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2007~2013년간 환급받기로 예정된 500억 유로 중 140억 유로를 포기토로 요청했으나 영국은 80억 유로만 포기하겠다고 주장하며 2007년 후 예산안이 표류했다. 2005년 12월 브뤼셀 정상회의에서 독일 메르켈 총리의 중재로 영국은 2007~2013년 간 총황금급 중 103억 유로를 포기하고, 유럽연합은 기간 중 예산 규모를 회원국 GNI 의 1.045%로 축소하기로 합의하여 예산안이 타결되었다.
6. 업무영역상의 갈등.
로마조약에 따라 집행위원회는 공동통상정책을 담당하고 있으며, GATT 관세 인하 협정과 UR 협상을 주도하였으나 비준과정에서 회원국과 집행위원회 간에 업무영역 논쟁이 제기되었다. 집행위원회는 유럽연합조약 133조에 따라 포괄적인 통상정책을 수행하므로 유럽의회의 비준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으나, 독일과 프랑스는 UR 협정상 관세인하 / 반덤핑 등 전통적 통상보호조치는 집행위원회의 권한에 속하나 서비스와 지적소유권 등 새로운 분야는 집행위원회가 교헙하였더라도 회원국 권한으로서 회원국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94년 6월 집행위원회는 사법재판소에 로마조약의 유권해석을 의뢰하였고, 독일과 프랑스는 집행위원회와 회원국의 권한배분을 정한 준칙 code of conduct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논란으로 UR 협정 비준안은 표류하기 시작했으나, 94년 11월 사법재판소가 서비스 GATS 와 지적소유권 TRIPs 등 새로운 분야는 회원국과 집행위원회가 권한을 나누어 갖는다고 해석함으로써 유럽의회와 회원국 의회의 비준을 모두 거친 후 확정되었다. 암스테르담조약은 집행위원회가 서비스 및 지적소유권 분야에서도 대외협상권을 갖도록 명문화했다.
7. 핵심그룹 논쟁
회원국 확대와 유럽통합이 본격화되자 국가간 이해는 더욱 첨예화되고 있는데 비해 조정기능은 약화되었다. 90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환율안정장치에 그리스는 처음부터 가입하지 않았고, 92년 9월 영국과 이탈리아는 탈퇴했다. 영국은 97년 5월 노동당정부 초기까지 근로자의 권리를 규정한 사회헌장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임산부의 유급휴가, 근로시간 제한, 파트타임 근무제 등 사회관련 공동법령의 채택을 거부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사람의 자유이동을 보장하는 쉥겐협약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영국은 공동정책 중에서 각 회원국이 필요로 하는 정책만을 선택적으로 참여 A La Carte 할 수 있는 차별적 통합을 지지한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와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가입을 눈앞에 둔 94년 8월 발라뒤르 프랑스 수상은 기자회견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 외에 1개국이 추가된 3개국이 공동정책을 주도하는 방안 Three-Tier Europe 을 제시했다. 9월 1일에는 독일 기민당 CDU 과 사회당 CSU 이 유럽연합의 회원국 확대 후 정책결정을 신속화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베네룩스 등 당초 공동체 설립국을 중심으로 핵심그룹 5 nation hard core 을 설치하는 정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정책보고서는 유럽연합 내 모든 국가가 통화동맹이나 사회정책, 외교/안보 정책을 동시에 추진할 수 없으므로, 핵심그룹이 먼저 통화/정치동맹을 추진하고 나머지 국가는 천천히 따라오는 다원적 속도 multi-speed 에 의한 연합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는 핵심권 중의 핵심국가 core of hard core 로서 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유럽연합의 의장국인 독일 집권당의 정책보고서가 발표되자 핵심그룹에 포함되지 않은 국가들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특히 영국과 공동체 창설멤버로 핵심그룹에 포함되지 않은 이탈리아는 물론 덴마크/스페인 등은 독일과 프랑스의 제안은 유럽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자, 콜 수상은 기민당의 보고서는 정부의 공식견해가 아니라고 진화했고,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도 수상의 발표를 부인했다. 유럽의회는 공식결의를 통해 핵심국가 설립을 거부함으로써 외형적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의사결정 과제로 남아 있다.
- 이희범, 유럽통합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