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학은 여전히 근사한 납땜질, 근사한 기구 생산 - <기술학> - 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매우 유용하긴 하지만, 우리를 거의 무식한 자들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면, <기계와 같은 인간들>) 의 지배하에 놓이게 할 우려가 있는, 참된 문화에 대한 일종의 위험물이다. 과학은 결코 문학이나 예술 또는 철학과 동등하게 말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의 외견상의 발견들은 단순한 기계적 발명들이며, 그 이론들은 도구들 간단한 장치들이나 거대한 장치들 이다. 과학은 우리의 일상적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새로운 세계를 드러낼 수 없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물리적 세계는 단지 외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깊이를 갖지 않는다. 세계는 바로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이다. 오직 과학적 이론들만이 그들이 보여주는 그대로가 아니다. 과학적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지도 않고 기술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지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 나는 많은 것들이 우리 앞에 감춰져 있으며, 그 중 많은 것들이 발견될 수 있다는 본질주의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의도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내가 이의를 제기하는 본질주의의 교설은, 과학은 오로지 궁극적인 설명을 목표로 한다는 교설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설명될 수 없으며, 더 이상의 어떠한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 설명을 목표로 한다는 교설이다.


 따라서 본질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의 목적은 본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갈릴레오의 과학 철학에서 (본질을 믿고 싶어했으나 자신의 작업이 그 믿음을 파괴해 버린 맥스웰에 이르기까지) 본질 관념에 의해 수행된 역할의 반계몽적 성격을 밝히는 데에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나의 비판은, 본질이 있든 없든, 본질에 대한 믿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되기 쉬우며, 따라서 과학자들이 본질의 존재를 가정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뉴턴 이론에 대한 본질주의적 해석은 로저 코티스 Roger Cotes 에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뉴턴은 물질의 모든 입자는 중력, 즉 다은 물질을 끌어당기는 고유한 힘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각 입자는 관성 즉 자신의 운동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에 저항하는 고유한 힘을 부여받았다. 중력과 관성은 둘 다 물질의 각 입자에 고유하게 내재해 있기 때문에 그 둘은 물체 내의 물질의 양에 엄격히 비례해야만 하며, 따라서 중력과 관성도 서로 엄격히 비례해야만 한다. 따라서 여기서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 비례의 법칙이 도출된다. 중력은 각각의 입자로부터 방사되기 때문에 인력은 제곱으로 비례한다는 법칙을 얻는다. 다시 말해 뉴턴의 운동 법칙들은 물질의 고유 속성에 기인하는 사태를 수학적 언어로 단순하게 기술한다. 그것은 물질의 본질적 성질을 기술한다. 그러나 코티스에 따르면 뉴턴의 이론은 적어도 물리학 내에서는 -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하며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가능한 그 이상의 설명은 신이 이러한 본질적 속성들을 물질에 부여했다는 것이었다)


 뉴턴의 이론에 대한 이러한 본질주의적 견해는 19세기 말까지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였다. 그러한 견해가 반계몽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가령 다음과 같은 유용한 물음들이 제기되는 것을 막았다. <중력의 원인은 무엇인가?> 혹은 (독립적으로 시험 가능한) 보다 일반적 이론으로부터 뉴턴의 이론 비슷한 것을 연역함으로써 중력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뉴턴 자신은 중력을 물질의 본질적 속성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데카르트로부터 사물의 본질은, 예컨대 중력처럼 한 물체와 다른 물체들 사이의 관계 (공간 중에서의 상호작용)를 결정하는 관계적 속성이 아니라 연장이나 운동 상태에서의 변화에 저항하는 힘과 같은 사물의 참된 속성이나 절대적 속성 (다른 사물들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속성) 이어야만 한다는 견해를 이어받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는 이 이론의 불완전성과 중력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중력은 물질에 대해 본유적이고 고유하며 본질적이어서 한 물체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다른 물체에 작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매우 불합리하다. 따라서 철학적 문제에 대하 충분한 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불합리함에 빠질 수는 없으리라 믿는다> - 1693 2 25일 리처드 벤틀리에게 보낸 편지 중.


 뉴턴이 여기에서 자신의 추종자들 대부분을 미리 비난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런 사실 때문에 데카르트 철학의 배경을 갖고 있던 뉴턴에게는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였던 그러한 속성들이, 학교에서 그것들을 배운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자명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뉴턴 자신은 본질주의자였다. 그는 직접 접촉에 의한 기계적 밀치기 mechanical push 의 가정 오직 이 밀치기만이 모든 물체의 본질적 속성인 연장에 의해 설명될 수 있었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허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종류의 인과 작용 에서 인력의 법칙을 연역해 내고자 시도함으로써, 중력에 관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궁극적인 설명을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만일 그가 성공했다면 그는 자신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즉 중력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예들은 본질에 대한 믿음이 (참이든 거짓이든) 사고하는 데에 새롭고 유익한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장애가 되기 쉽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준다. 더욱이 그것은 과학의 일부일 수 없다. 왜냐면, 설혹 우리가 운 좋게도 본질을 기술하는 이론을 우연히 찾아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계몽으로 이끌기 쉬운 신조는 분명 과학자들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과학 외적인 믿음들 (가령, 비판적 토론의 힘에 대한 신념과 같은 것)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다.

 

 -  Contemporary British philosophy : personal statements / edited by H.D. Lewis. Vol. 3.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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