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4세가 1821년 보기 흉하 두피낭종을 외과적으로 절제하기로 결정했을 떄, 그는 간단한 수술로 인해 목숨이 위험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지가 살던 시대에는 그가 계획한 종류의 시술에 따르는 사망률이 오늘날의 심장절개 수술로 인한 사망률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 무지막지한 살인자는 수술 후 감염이었다. 모든 외과의사들이 치료를 하려고 메스를 집어들 때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그 유령이 의식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들의 꿈속에 나타났다. 그 당시에 의사가 된다는 것은 수술 현장의 날카로운 비명과 몸부림뿐만 아니라 수술실 공기를 더럽히는 부패한 살에서 나는 구역질나는 냄새에 단련된다는 의미였다.
요즘에야 순식간에 스며드는 단도의 염증이 우리가 연쇄상 구균이라 부르는 둥근 사슬 모양 세균의 독성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쿠퍼의 시대에 그 질병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딱 한 가지, 발작이 환자의 베인 상처 조직에 빠른 속도로 번진다는 것이었다. 일단 증상이 시작되면 신의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병의 진행은 막을 길이 없었다. 아무도 수술 중 생긴 상처에서 왜 단독이 생기는지 알지 못했고, 그것을 예방하는 방법도 몰랐으며, 그 엄청나게 빠른 진행 속도를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수술 후 감염은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점차 골칫거리가 되어갔다. 상처 감염은 너무 일반적인 합병증이라 수술이 끝나면 환자들과 의사들은 으레 고름을 예상하게 되었다. 가끔은 약간의 염증도 없이 깨끗하게 나아서 관찰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상처들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고 그 원인도 설명할 수 없었다. 환자가 운이 좋으면, 상처가 난 자리만 곪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에는 5~6일 내에 냄새가 없는 걸쭉한 크림색 분비물이 상처 가장자리를 통해 밖으로 흐른 다음 차차 건강한 반흔 조직과 함께 상처를 메웠다. 이런 고름은 '건전한 고름'이라고 불리며 손꼽아 기다려지는 대상이었다.
훗날 그 건전한 고름은 포도상 구균의 활동으로 생긴 것이라고 밝혀지게 된다. 주로 상처 깊숙한 곳에 잠복하는 다른 세균 침입자들과 비교했을 때 포도상 구균은 19세기 외과의사들의 친구라 할 수 있었다. 반면 연쇄상 구균은 고름과 함께 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그 유해한 것을 빼낼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관목 지대의 화재처럼 원형으로 퍼지며, 유독물질을 혈류로 미리 보내는 악성 세균이었다. 죽음의 징조와 마찬가지로 그 독소 자체는 고열과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의 오한으로 알 수 있었다. 의사들은 그 증후군을 단독이라 불렀지만 환자들은 성 안토니오의 불 St. Anthony's Fire 이라 불렀다.
그러나 희생자 모두에게 끔찍한 죽음을 선고하는 또 다른 형태의 감염이 있었다. 병원 괴저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악취가 나고 메스꺼운 부패 작용이었다. 그 감염은 여러 세균들이 뒤섞인 결과였다. 그 세균들 중 일부는 지금 우리가 혐기성 세균이라 부르는 것들인데, 산소가 없는 곳이 그 세균에게 최고의 번식 환경이라 무기력한 숙주의 조직 깊숙이 침입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죽였고, 코를 찌르는 악취를 만들어 여러 세대에 걸쳐 유럽과 미국의 외과의사들의 옷에 배었다.
어떤 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미생물 집단이나 그 미생물을 포함하고 있는 핏덩어리가 언제라도 감염된 상처에서 혈관으로 들어가서 패혈증과 농혈증이라 불리는 혈액 중독을 일으켜 문제를 악화시킬 수도 있었다. 수술 후 감염된 자궁에서 발생하는 단독이나 패혈증, 또는 농혈증은 산욕열 환자들을 손을 씻지 않은 산부인과 의사들의 희생물로 만든 전염병이다. 또한 항상 파상풍의 위험이 존재했다.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이나 농장에서 생긴 사고에서는 더 흔한 병이었지만, 파상풍은 대도시 병원 건물에서 수술을 한 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1867년, 클로로포름 마취제의 발명자인 에든버러의 제임스 심슨 경은 "병원 제도 Hospitalism"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런 수술에 대한 실망스러운 통계 자료를 제시했다. 영국에서 병원에 입원 중인 사지 절단 수술 환자 2천명 이상의 결과를 조사행서 300개 이상의 병상이 있는 병원에서 수술이 이루어졌을 경우 41%의 환자들이 사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감염은 단연 가장 주된 사망 원인이었다. 병원 밖에서 절단 수술이 이루어진 다른 환자 200명 중에서는 11%만이 사망했다. 수술 후 사망률 숫자는 유럽의 모든 병원에서 높게 보고되었다. 파리는 60%, 취리히 46%, 글래스고 34%였고, 베를린, 뮌헨, 코펜하겐, 다른 도시들도 그와 비슷했다.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절단 수술 환자 사망률은 26%, 펜실베이니아 병원은 24%로 보고되었다. 심슨의 경고는 정확했다. "우리나라 외과 병원 중 한 곳의 수술대 위에 누운 사람은 워털루 전투의 영국 군인들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다" 패혈증으로 인한 높은 사망률 때문에 몇몇 유럽 도시에서는 가장 평한이 안 좋은 병원들이 철거되었다.
감염 위험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체 내부의 수술은 불가능했다. 수술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했고, 사지 절단 그리고 가슴과 체벽의 종양 제거에만 국한되었다. 1847년과 1870년 사이에 메사추세츠 종합 병원에서 시행된 수술 1,924건 다운데 1,098건은 절단 수술, 237건은 가슴 종양이며, 나머지는 거의 모두 비교적 덜 중요한 신체 부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감염률은 모든 집단에서 높게 나타났고, 사망률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프레데릭 트레비스 Frederick Treves 경이 1870년대 초 [오래된 응접실 Old Receiving Room]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묘사하는 런던의 병원 수술실 모습이다.
"치료는 매우 거칠었다. 외과의사도 거칠었다. 그는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던 시절, 고통에 냉담할 뿐만 아니라, 거칠고, 강하고, 재빨라야 했던 시절의 태도를 답습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것으로, 질병의 유감스러운 측면이었다.
수술실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또 밤이나 낮이나 항상 불이 켜 있는 난로가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부터 했던 대로, 지혈을 할 때 사용하는 인두를 달구기 위해 항상 불을 준비해 놓는 것이었다. 패혈증은 병실에서 일반적인 병이었다. 사실 심각한 상처는 모두 곪는다고 볼 수 있었다. 고름은 가장 흔한 대화 주제였다. 외과의사의 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녹색 빛이 나는 묽은 고름은 보기에도 좋지 않았을 뿐더러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장액성(漿液性)' 고름은 가장 심각한 상태의 고름이었다.
청결함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어울리지 않았다. 외과의사는 도살장을 연상시키는 검정색 프록코트를 입고 수술을 했다. 그것은 몇 년 간 말라붙은 피와 오물로 인해 뻣뻣했다. 코트가 더 많이 축축할수록 그 외과의사가 유능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상처는 기름에 적신 붕대로 감았다. 기름과 붕대는 솔직히 말해 오염된 것이었다. 붕대는 버려진 리넨에서 얻은 폐기된 면사의 일종이었다.
병실에는 스펀지가 하나 있었다. 그 악취가 나는 물건과 한때는 깨끗했던 대야의 물로 하루에 두 번씩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들의 상처를 닦았다. 이 때문에 환자가 회복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병원 괴저로 모든 병실에서 많은 환자들이 사망했다."
이때까지 현미경은 기대했던 것만큼 과학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7세기 초 현미경을 이용해 "온통 털과 무척 날카로운 발톱으로 뒤덮인, 양처럼 큰 파리" 를 보았다는 갈릴레오의 이야기는 사실 아무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나중에 안톤 반 레벤후크가 직접 설계하고 만든 우수한 렌즈를 이용해서 그가 극미동물이라 부르고 우리가 지금 세균이라고 부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잠시 1660년 마르첼로 말피기의 모세혈관 증명을 포함해서 현미경에 의한 발견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확대 시스템은 일그러진 상을 만들어내기 일쑤였고, 18세기 내내 현미경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의 원인이 되었다. 현미경의 배율이 높아질수록 렌즈의 둥근 모양과 보통의 빛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깔로 분산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고배율 현미경을 사용할 수 있도록 수차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1826년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바티스타 아미치가 발명한 유침대물렌즈였다. 그것은 굴절력이 다른 매개체를 통과한 빛이 인간의 눈과 동일한 방식으로 수차를 발생시킨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글래스고 대학의 외과교수 조셉 리스터는 산소가 고름의 부패 작용을 일으킨다는 당대의 개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 개념을 주장하려면 건강한 육체가 저절로 감염되어야 했다. 게다가 그의 경험상 골절된 늑골이 폐에 구멍을 내어 공기가 상처로 들어가게 했을 때 흉부 감염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상처로 들어오는 어떤 이물질이 원인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루이 파스퇴르가 그 세상을 처음으로 탐험한 사람은 아니다. 옛날부터 언젠가 '전염성 생물 contagium animatum'이 발견되고, 이것이 질병의 원인을 설명하게 될 거라는 이론을 세운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인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리우스 Girolamo Fracastorius는 1546년 '보이지 않는' 병원체를 예견하기까지 했다. 1676년 레벤후크는 런던 왕립학회에 보낸 편지들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극미동물'을 설명했다. 그는 물에서, 그리고 물에 잠긴 유기물질에서 나중에는 자신의 어금니 부스러기에서 이 생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연쇄상구균, 간균, 나선균이라고 알고 있는 세균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질병 대문에 배출되는 물질에서 애써 그러한 세균을 찾느라 수고한 사람이 없었다.
그후, 루이 파스퇴르는 그 세균들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자연발생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1857년과 1859년에 발표 실험의 결과와 추적 연구 결과를 프랑스 과학원 학술지 Compte Rendu de l'Academie des Sciences 에 발표했다. 조셉 리스터는 파스퇴르의 논문들을 읽고 또 읽고, "인체 조직에 심각한 해를 끼치지 않는 물질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면, 이미 그 안에 있는 세균들을 죽이게 될 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균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조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면 산소를 포함한 공기가 자유롭게 상처에 닿더라도 부패 작용을 막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소독을 위한 독으로, 인근의 칼라일 Carlisle 에서 도시 쓰레기의 악취 제거에 사용하던 석탄산을 선택했다.
그는 1865년 8월 12일, 짐수레 마차에 치여 골절된 경골이 피부를 뚫고 나와 다리에 4cm x 2cm 정도의 상처가 생긴 소년을 치료하는데 석탄산에 담갔던 리넨 붕대를 사용했다. 치료에는 6주가 걸렸고, 리스터의 첫 임상시험은 성공이었다.
경험이 쌓여 감에 따라 리스터는 석탄산을 상처만이 아니라 의료진의 손은 물론 모든 수술기구에도 사용했다. 수술 후 관리는 주기적 붕대 교체로 이루어졌고, 붕대를 가는 동안 상처에 닿는 모든 것은 소독액으로 가득한 공기 환경에서 다시 소독되었다.
"소독을 하기 전, 35명 중 16명 사망, 소독을 한 기간 동안 40명 중 6명 사망"
글래스고 밖의 다른 영국 외과의사들은 아직 소독법이나 그것의 바탕이 되는 원리인, 세균이 어떤 질병과 조직 부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이 무렵에는, 감염된 상처에서 세균을 발견한 것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균이 감염의 원인이라기보다 부패 작용이 시작된 후에 상처에 들어간 이차적인 침입자라고 믿었다. 다른 회의론자들은 세균이 무해한 오염 물질이라고 여겨 그것이 감염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리스터가 복합 골절과 농양, 절단 수술의 치료 결과를 개선한 것에도 수긍하지 않았다.
세균 이론에 관한 기사는 그 당시 미국 의학 잡지에 드물게 실릴 뿐이었다. 미국 내과의사들에 따르면, 세균이 질병의 원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는 아직 명확한 답이 없는 실정이었다. 미국 의학 사상에 있어 과학은 아직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비롯된 의학 사상은 전부 외국의 영향을 받은, 어딘지 수상스러운 기색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렵 대륙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특히 독일어권 외과의사들은 미국인들보다 세균이 감염의 원인이라는 개념을 믿을 준비가 훨씬 더 잘 되어 있었다. 일단 세균 이론이 받아들여지자 소독법이나 그와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선구자들 중 한 명인 뮌헨의 리터 폰 누스바움 Ritter von Nussbaum 은 리스터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잇달아 놀라고 있습니다. 병원 괴저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병원의 수술 결과는 갈수록 좋아지고, 치료 시간은 짧아지고 있으며, 농혈증과 단독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과학사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것처럼, 혁신이 등장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 것은 전쟁의 비극이었다. 짧았지만 격렬했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 때 소독법을 사용한 몇몇 외과의사들은 자신들의 환자 사망률이 대다수 동료들의 환자 사망률보다 훨씬 더 낮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연이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Schleswig Holestein 군과 하노버 군의 의무감을 지낸 조지 프리드리히 루이스 슈트로마이어 George Fredrich Louis Stromeyer는 절대 무능한 의사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집도한 환자들의 수술 후 사망률은 무시무시했다. 무릎 관절을 절단한 환자 36명 전원이 사망했다. 프랑스의 통계 자료도 칭찬받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절단 수술 13,173건이 프랑스 육군 병원에서 시행되었는데 무려 10,006명이 사망했다.
영국 버밍엄 미들랜드의 외과의사 로손 데이트는 1887년 영국의사협회 연설에서 "저는 세균 같은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자신이 수술한 환자들의 사망률이 낮은 이유는 배액관과 흡수성 붕대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의 본능 덕분이라고 했다 데이트는 수술 전 꼼꼼하게 손을 씻고 충분한 양의 세제와 뜨거운 물로 수술 기구들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비웃던 바로 그 이론인 무균법 예방 처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독일 외과 수술 환경에 스며들기 시작한 강력하고 압도적 동향에 저항하고 있었다. 소독법과 마취 덕분에 가능해진 수술은 새로운 방식을 이용해서 꼼꼼하고 신중하게 실행하는 것이 예전처럼 속도의 현란한 손재주를 강조하는 것을 대체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더 이상 산소가 상처로 들어가 곪기 전에 그리고 발버둥치는 환자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건강한 조수들에게서 도망치기 전에 30초 만에 다리를 절단할 필요가 없었다.
파스퇴르의 계속된 연구가 세균이 전염병을 일으킨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1878년 로버트 코흐 Robert Koch 라는 34세의 독일 세균학자가 처음으로 특정 세균이 특정 질병의 원인임을 밝혀내고 순수 배양한 세균을 다른 동물에게 주입하는 단순하고 분명한 실험으로 탄저병에 걸린 동물 피에서 발견한 간균이 그 병의 병리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병원체임을 입증했다. 1878년, 코흐가 기념비적 논문 [상처 감염의 병인론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여섯 가지 다른 종류의 수술 부위 감염을 여섯 가지 세균과 연결할 수 있었다.
이후 사람들은 공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세균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생물은 필연적으로 공기 중에서 떨어지는 미립자기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주된 감염의 명백한 근원은 의료 팀, 즉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손과 수술 기구였다. 상처 감염은 월트 켈리의 인기 만화 주인공 포고Pogo가 말한 것처럼 "적을 만났는데 알고보니 우리였"다.
외과의사는 수술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수술 도구는 끓여서 소독해야 하며, 상처를 덮는 천은 세균이 없어야 한다. 석탄산이든 다른 동일한 효과가 있는 약품이든 간에 환자의 피부를 살균제로 소독한 후에 살균한 손으로 쥔 살균한 칼로 절개해야 상처가 감염되지 않는다. 불결한 낡은 프록코트는 새로 세탁한 살균 가운으로 바꿔야 한다. 무균법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 Sherwin B. Nuland - Doctors: The Biography of Medic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