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와 같은 건축의 아성을 구축한 밀라노에서 정부의 중앙 권력은 여러 계층, 산업, 신문, 기독교 민주당의 봉건 영주들이 적대 관계의 요새를 파괴하려고 할 때 비로소 개입했다. 중앙 권력은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거나 상황이 수년 전부터 불법이었다고 믿는 듯한 태도를 견지하고 관련 책임자를 문책했다. 대봉건 영주들의 거센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한, 가련한 교회 기사단들과 타락한 수도승들은 자체의 내규와 금식을 지키고 방탕함을 금지하여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영지나 수도원을 자치적으로 운영한다.
학생들은 강의실이 많은 수강자들로 북적이고 강의가 지나치게 권위적이라고 불평했다. 교수들은 제자들과 더불어 세미나를 열려고 했으나 그 순간 경찰이 개입했다. 경찰과의 충돌에서 다섯 명의 학생이 사망했다. (1200) 그 결과 개혁이 추진되어 교수와 학생들은 자치권을 획득했다. 추기경은 여섯 명의 교수가 추천한 후보에게 강의를 제한할 수 없었다 (1213) 노트르담 사원의 추기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금서로 규정했다.
학생들은 책값이 지나치게 비싸다고 항의하면서 서점을 급습하여 집기들을 닥치는 대로 훼손했다. 이에 경찰은 궁사들을 동원하여 행인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학생들은 인접한 거리에서 돌을 던지며 공권력을 공격했다. 경찰은 반격을 했고 이 과정에서 학생 세 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학은 총파업을 선언하고 모든 건물들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며 정부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학생과 교수들은 대학가 주변 지역으로 철수했다.
오랜 협상 끝에 왕은 학생들을 위한 숙소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대학 기숙사와 학생 식당을 설치하는 것을 내용으로 법령을 선포했다. (1229) 탁발 수도회가 열두 개의 강좌들 중에 세 개를 차지했다. 이번에는 세속 신분의 선생들이 들고일어나 탁발 수도회의 마피아적인 행위를 규탄했다. (1252) 1년이 지나 학생과 경찰 사이에 격렬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세속 신분의 선생들은 자신들의 연대감을 표시하는 의미에서 학생들의 행동에 동참했다. 반면 교단 소속의 교수들은 자신들의 강좌를 계속했다. (1253) 대학은 교황과 분쟁 관계에 돌입했다.
결국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학부 위원회의 과반수가 찬성하는 경우, 파업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몇몇 선생들이 이에 반대하다가 파면을 당했고 기욤 드 생타무르, 외드 드 두아이, 크레티앙 드 보베, 그리고 니콜라 드 바르쉬로브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파면된 교수들은 [최근 사태의 위험]이라는 백서를 출판했으나 이 책은 1256년에 선포된 인장 교서에 의해 <유해하고 범죄적이며 극악무도한> 것으로 비난받았다.
- 질레트 지글러 Giliette Ziegler, [Le Défi De La Sorbon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