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 (천천히 등장) 오래 산 덕택에 기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중대한 문서를, 먼저 들으신 다음 보아 주십시오.

  이것이 모든 화를 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낭독한다) "알고자 하는 자에게 널리 알리노라.

  이 종이조각은 천 크로네로서 통용된다.

  그 확실한 담보로 충당되는 것은 제국 안에 수없이 매장되어 있는 보물이다.

  그 풍부한 보물은 곧 발굴되어 그 태환에 쓸 준비가 갖추어졌다"

황 제: 고얀 짓거리, 어이없는 사기구나!

  여기에 황제의 친서를 위조하여 서명한 자가 누구냐?

  이런 범죄가 벌도 받지 않고 있단 말이냐?

  재무 대신: 기억이 안 나십니까? 폐하께서 친히 서명하셨습니다.

  바로 어젯밤의 일입니다. 폐하께서 위대한 신 판으로 가장하셨을 때 재상께서 저희들과 함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성대한 잔치의 기쁨이 백성의 행복이 되도록 한 줄 적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이죠.

  폐하께서 흔쾌히 적어 주셔서, 어젯밤 안으로 요술사를 시켜 몇천 장을 만들게 했습니다.

  폐하의 자비가 만인에게 골고루 베풀어지도록 갖가지 지폐에 다같이 폐하의 관인을 찍게 하여 10, 30, 50, 100 크로네짜리 지폐가 만들어졌습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폐하는 모르실 것입니다.

  도시를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는 반죽음으로 곰팡이가 슬어 있더니 모두 활기를 되찾아 즐거움에 들끓고 있습니다!

  폐하의 어명은 예로부터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만 이번처럼 백성들이 우러러 받든 적은 없습니다.

  서명하신 문자만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습니다.

황 제: 그러면 백성들 사이에는 이 종이조각이 금화 대신 통용된단 말이냐?

  지난 일이지만, 이젠 할 수 없구나.

궁내 대신:날아가듯 흩어진 것을 회수할 수는 없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 세상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환전상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물론 할 일은 하지만, 지폐마다 금화나 은화로 바꾸어 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곧장 푸줏간이나 빵집, 술집으로 달려갑니다.

  세상 사람 반은 먹는 것만 생각하고, 나머지 반은 새 옷을 사 입고는 뽐내고 있습니다.

  피륙상에서는 천을 끊고, 재단사는 옷감을 마릅니다.

  황제 폐하 만세! 소리가 술집마다 쏟아져나오고, 쟁반 소리도 요란하게 음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메피스토펠리스: 공원에서 혼자 산책하고 있으면,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의젓한 공작 날개 부채로 한쪽 눈을 가리고 방싯 웃음을 머금은 채 지폐를 곁눈질합니다.

  그러면 애교를 부리거나 아첨하는 것보다 쉽게 색정을 맛볼 수 있지요.

  지갑마다 주머니를 안 가지고 다녀도 지전 한 장쯤 품속에 수월하게 들어갑니다.

  연애 편지와 함께 넣어 두기도 편리하지요.

  신부는 점잖게 기도서에 끼워 두고 병사들은 '뒤로 돌아'를 재빨리 할 수 있게 전대가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시시한 이야기로 이 위대한 사업의 품위가 깎였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파우스트: 무진장한 보물이 폐하 나라의 땅 속 깊숙히 묻혀서 이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생각으로 그 양을 짐작하더라도 그것은 하찮은 척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공상을 아무리 멋대로 해 보아야 공연히 힘만 들 뿐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무한한 것에 무한한 신뢰감을 갖는 법입니다.

메피스토펠리스: 금이나 진주를 대신하는 지폐는 아주 편리해서 주머니 속을 환히 알 수 있지요.

  우선 값을 매기거나 돈으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주색의 즐거움도 쉬 맛볼 수 있고요.

  경화가 필요하면 환전상이 있고 거기도 없으면 잠깐 파 오면 되지요.

  황금잔이나 황금 사슬은 경매에 붙여져서 지폐로 그 값이 치러집니다.

  우리를 비웃던 거만한 자들은 부끄러워할 겁니다.

  익숙해지면 이것 없이 못 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이 영토 안에선 어디를 가나 보석이며 금이며 지폐가 남아돌게 되지요.

황 제: 우리 나라는 그대들 덕택에 큰 복리를 얻었다.

  당장 그 공에 어울리는 상을 내리노니 국내의 땅 속은 그대들에 맡기노라.

  가장 훌륭한 보물의 관리자니까.

  보물이 매장된 넓은 곳을 알고 있으니 발굴의 지시를 그대들에게 일임한다.

  우리 재보의 관장자인 그대들은 마음을 합하여 거룩한 직책을 기꺼이 완수하고 땅 밑의 세계와 땅 위의 세계를 서로 맺어 이 나라 복지에 이바지해 다오.

재무 대신: 이 두 사람과 조금도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마술사를 동료로 갖게 되어 좋아하고 있습니다.

황 제: 궁정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폐를 줄 터이니 무엇에 쓸 것인지 솔직히 말해 보아라.

시종1: (받으면서) 신나고 명랑하고 재미있게 살겠습니다.

시종2: (마찬가지로) 곧 연인에게 목걸이와 반지와 팔찌를 사 주겠습니다.

시종1: (받으면서) 앞으로는 실컷 좋은 술을 마시겠습니다.

시종2: (마찬가지로) 주사위가 주머니 속에서 굼실거리고 있습니다.

기사1: (신중하게) 저의 성과 밭을 담보로 얻은 빚을 갚겠습니다.

기사2: (마찬가지로) 다른 보물로 바꾸어서 저축하겠습니다.

황 제: 나는 새로운 사업을 위한 의욕과 용기를 기대했었다.

  허나 역시 그대들이라, 내 짐작이 빗나가지 않았구나.

  잘 알았다, 아무리 보물의 꽃이 피어도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변치 않을 것이다.

어릿광대 (앞으로 나오며) 주실 물건이 있으시면 저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황 제: 살아 있었구나! 너는 지폐를 준다면 술로 다 마시고 말 게다.

  어릿광대: 마술 지폐!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황 제: 그럴 테지. 어차피 쓰는 방법이 나쁠 테니까.

어릿광대: 여기 지폐가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황 제: 넣어 둬라. 네 앞에 떨어진 것이니까. (퇴장)

어릿광대: 5천 크로네가 내 손에 들어왔다!

메피스토펠레스: 두 발 달린 술부대야, 되살아났구나?

어릿광대: 가끔 있는 일이지만, 이번처럼 운이 좋은 적은 없었어요.

메피스토펠리스: 땀까지 흘려가며 몹시 기뻐하는군.

어릿광대: 이것 좀 보십시오. 이것이 정말로 돈 값어치가 있단 말입니까?

메피스토펠리스: 그것으로 실컷 먹고 마실 수 있지.

어릿광대: 밭이나 집이나 가축도 살 수 있나요?

메피스토펠리스: 물론이지! 어떤 물건이든지 다 손에 넣을 수 있다.

어릿광대: 숲과 수렵장과 양어장이 있는 성도요?

메피스토펠리스: 암! 네가 영주가 된 꼴을 보고 싶구나!

어릿광대: 그럼, 오늘 밤엔 영주가 되는 꿈이나 꾸어 볼까! (퇴장)

메피스토펠리스: (혼자서) 저 어릿광대가 제일 영리한 것 같구나!

 

     - Johann Wolfgang von Goethe. "Faust" 중에서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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