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이 되기 몇 달 전, 알 카에다 신병을 모집하는 비디오테이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밀반출돼 아랍 세계 전역에 유포됐다. 오사마 빈 라덴과 고위 참모진은 무슬림 젊은이에게 이슬람을 보호하고 전파해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가 있다고 설파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원년인 622년, 예언자 모함메드와 "추종자 sahaba" 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면서, 현재 아랍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서구 문명의 유해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서구 문명의 폐해를 치료할 방법은 오로지 신의 말씀에 있다. 바로 히즈라 hijra와 지하드jihad이다"라고 덧붙였다.
히즈라는 무슬림이 종교 deen 적 의식을 거행할 수 없는 곳에서 이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땅으로 이주하는 것을 말한다. 지하드는 신의 뜻을 받들고 기리기 위한 전쟁을 의미하여 이는 무력을 강조한 오사마 빈 라덴의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모함메드는 메카에 이슬람을 뿌리내리기 위해 13년 동안 고초에 시달렷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메디나로 이주하는 것이 탄압을 피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가 될 것이라는 계시wahi에 따라 이주를 결심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틈을 타 모함메드와 무슬림 추종자는 이교도 jahili 의 눈을 피해 메디나로 피신했다.
히즈라는 당시 모함메드의 이주에서 비롯됐다. 무슬림에게 정신적 영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비디오테이프에서 언급한 지하드는 624년 모함메드가 바드르 Badr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이교도를 모두 처단하고 메카로 금의환향한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빈 라덴은 미국과 서구세게에 항전하다가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등지로 피신해 다닌 본인의 경험을 622년 모함메드가 메디나로 이주했던 것에 비춰 이야기했다. 이는 빈 라덴과 추종자 세력이 예언자 모함메드가 그랬던 것처럼 무슬림 전체를 대신해 수모와 박해를 감수하며 희생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궁극적으로는 신의 뜻과 예언을 받들어 "의로운 전임자 salaf"를 추종하는 빈 라덴 세력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적 메시지도 담겨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21세기의 메디나였던 것이다.
꾸란 Qur'an 에서 지하드에 대한 공식 승인은 메디나 시기에 이르러 처음 언급됐다. "침략하는 자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이 너희[신도]에게 허락되나니 모든 잘못은 그들(불신자)에게 있노라. 신은 전지전능하사 너희에게 승리를 주시니라. '우리의 신은 오직 알라뿐' 이라고 말한 것으로 말미암아 부당하게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이 있노라" (22:39~40) 모함메드는 메디나에서 전쟁 gital 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전쟁은 이제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됐다. ("비록 싫다 해도 너희에게 지하드가 허락되었노라. 너희가 싫어하나 복이 되는 것이 있고 너희가 좋아한다 해도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신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2:216) 이것은 일종의 회개 tawba 이자 신과의 언약이었다. "신을 섬기는 사랑의 생명과 재산은 모두 신의 것이며, (대신) 신도는 신의 품에서 살 수 있다. 그들은 신의 뜻을 섬기기 위해 싸우고 죽고 죽인다: 법과 복음과 꾸란을 통해 절대 복종을 약속한 것이니, 신보다 복음에 더 신실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전쟁에 대한 승인은 바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의무로 이어졌다. 모함메드는 무슬림에게 지하드를 실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므로 그대 혼자서라도 신의 뜻에 따라 투쟁하고 신도를 격려하라. 신께서는 불신자를 미리 제지해 주시리라. 신은 힘이 있으시되 가장 강하시고 벌을 주시되 가장 큰 것을 주시니라" (4:84)
지하디스트의 여정은 멀고 험난한 길이었고 신의 뜻을 섬기는 무슬림은 예측 불허의 길을 떠나야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했던 모함메드를 언급하면서 무슬림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지원과 도움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 과연 얼마나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30년 넘게 계속된 이슬람을 둘러싼 분열은 무슬림의 사회기반과 정치체제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혼란은 아랍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긴장은 멀리 뉴욕, 워싱턴, 마드리드, 런던, 파리 등지에까지 미쳤다. 현대 지하드주의 jihadism 의 궁극적 목적은 무신론이 지배하는 국내외 정치,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이슬람 교리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지하디스트 간 내분이 심화됐고 오사마 빈 라덴과 이인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 Ayman al-Zawahiri 는 지하디스트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계획을 구상했다. "가까운 적 al-Adou al-Qareeb" (무슬림 이단자, 변절자) 이 아닌 "먼 적 al-Adou al-Baeed" (이스라엘과 미국 등 서구 세계) 을 대상으로 삼은 투쟁이 시작됐다. 무슬림 대부분은 아랍 세계의 내분과 갈등 고조의 원인으로 미국을 꼽았다. 알 카에다 지하디스트는 미국을 상대로 한 자신들의 투쟁이야말로 이슬람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고 믿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을 통해 자신과 추종자를 포함한 숨은 세력을 무슬림 세계에 보여주고, 자신들이야말로 이슬람 공동체 ummah 를 이끌 지도자임을 알리려고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 같은 대담한 공격만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성공여부는 오직 미국의 반응에 달려 있었고, 빈 라덴은 미국이 알 카에다에 반격을 하고 9.11과 상관없는 국가까지 가세한다면 분노한 무슬림이 지하드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작 아랍 사회에서 알 카에다에 가담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실제로 9.11은 무슬림 사회의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서구 언론은 지금도 9.11이 이슬람 공동체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또 당시 자살폭파 대원 19명의 존재는 무슬림 정치 문화의 비 도덕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슬람 공동체에서 계속되는 자살폭파와 참수 같은 사건은 이러한 평가가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9.11은 이슬람 공포증을 고조시켰으며 이슬람 지하드주의는 서구 세계에 이슬람과 일반 무슬림이 죽음의 문화를 수용하고 전파시킨다는 잘못된 관념을 강화시켰다.
많은 무슬림 젊은이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정치, 문화적 억압에 시달리며, 직장을 구하지 못해 집을 얻거나 결혼 자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미묘한 시선을 항상 느껴야 했다. 젊은 무슬림은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집단 처벌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근본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한다. 현재 30세 이하 무슬림은 이슬람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한다. 그들은 권리를 상실한 채 거대한 유권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좌절한 젊은이가 모두 폭력성을 띄거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즘은 아랍 세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뿐더러 아랍 세계의 전유물도 아니다. 수십 년 전, 온갖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내세운 유럽 무장 단체가 전 유럽을 초토화하고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 테러리즘의 잔학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조차 이러한 위기가 유럽과 서구문화, 종교타락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서구 기독교 부패가 문제 원인이라고 역설한 사람도 없었다.
일부에서는 알 카에다 테러 전술이 이슬람의 전통 지하드 기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최근 유럽에서 형성된 일련의 급진적이고 진보적 운동 또는 제 3 세계 운동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허무주의를 용인하지 않는 이슬람에서 알 카에다는 예외적 분파이다. 알 카에다는 자신의 고행이 모든 무슬림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들의 정치 투쟁을 종교적 수사로 선전한다. 오사마 빈 라덴이 지하드를 외면하는 동료 무슬림을 질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믿음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다른 어떤 것도 우선시 될 수 없다. 믿음 없이 어떻게 종교가 존속될 수 있겠는가. 나라의 존속과 영광이 모두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 적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만 종교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너희가 예루살렘과 이라크에서 서구 세력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이 너희를 몰아낼 것이다. 또한, 너희에게서 성지의 땅[사우디아라비아]를 빼앗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바그다드를 빼앗았고 내일은 리야드 Riyadh 를 점령할 것이다"
과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자 그 안에 억눌려 있던 정치, 사회적 갈등이 쏟아져 나왔고 소수집단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마음대로 분하라고, 뒤이어 민족주의 국가가 건립되면서 시작됐다. 반유대주의는 애초에 유럽에서 발생했다. 반면, 이슬람 공동체에서 반유대주의는 갑작스럽게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강제 추방되면서 생겨났다. 여전히 무슬림 인종 차별주의자가 접하는 글들은 주로 유럽에서 나온 반유대주의 선동문 (시온의정서나 홀로코스트 부정론 등) 이다. 반유대주의 정서는 다분히 정치적임에도 순전히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유럽인과 유대인의 인종적 차이에 근거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아랍 세계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아랍인과 유대인은 같은 셈족이고 박해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의 아랍인은 자신들이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요르단의 대표적 이슬람주의자 라이트 슈비알라트 Laith Shubialat 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인종을 배척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언론에서는 연일 불안정한 아랍 사회 소식을 보도한다. 물론, 중동 지역에서 정치 격변이 지속된 건 사실이다. (중동은 이슬람이나 무슬림과 동의어가 아니다. 중동 지역 내 모든 무슬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무슬림이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으며 이 지역에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도 많다) 잇따른 자살폭파 사건은 아랍 세계에 야만성과 폭력성이 만연해 있다는 편견을 증폭시켰다. 서구 국가들은 값싼 아랍산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세계 경제가 중동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흔들릴까 우려한다. 다만, 한 세기 이전 서구 식민주의가 이 지역의 자유와 자결에 대한 열망을 꺾었다는 건 분명하다.
서구식 정치 체제는 취약하나마 무슬림 지역 내에 뿌리내렸다. 현재의 국경선이 재편성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지역 내 지배자는 기존 정치 질서를 유지할 광범위한 유인책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강대국 역시 이 지역에 많은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이 이웃 국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이라크의 속국으로 편입시켰을 때, 미국은 페르시아만에 50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강대국은 이 지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이익을 챙겨갔다. 서구 세력의 영향으로 권좌에 오른 아랍 독재자는 자신의 생존을 서구 국가에 의탁하는 대가로 충성을 서약했다.
식민주의 개입이 아니더라도 국가형성 과정에는 장기간에 걸쳐 복합적이고 큰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레바논과 무슬림 국가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정치, 사회 발전은 역사적 패턴과 대체로 일치한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는 민주주의가 안정권으로 진입하기 전에 유혈 투쟁을 경험했다.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슬림 국가는 종교적 언어와 색채로 발전단계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강력한 반체제 수단으로 등장한 이유는 권위주의 무슬림 지배자가 세속적, 진보적, 비종교적 반대파를 성공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한 이집트 무장 이슬람주의자는 "오늘날 아랍 정치권 내에서는 세속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민족주의자는 전혀 발 디딜 틈이 없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무슬림 독재자조차도 시민사회의 중추이자 반체제 조직의 피난처가 된 모스크를 장악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제한적 민주주의의 직접 수헤자는 지하디스트나 자유 민주주의자가 아닌 주류 이슬람주의자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슬람 활동가는 이집트, 이라크, 이란,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 파키스탄, 쿠웨이트, 터키 등지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하마스(Hamas: Islamic Resistance Movement)가 예상을 뛰어넘는 큰 차이로 승리했을 때 전 세계는 긴장했다. 132석 중 74석을 차지한 하마스는 겨우 45석을 얻은 기존 파타 Fatah 당을 권좌에서 내몰았다.
무슬림 표가 주류 이슬람주의자의 입지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속주의 지배자는 일자리 창출에 실패했고 각종 사회 복지혜택과 교육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 또, 외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국방력을 강화하지 못했다. 점점 더 많은 무슬림이 기존 정치권의 무능함헤 회의를 느끼고 이슬람주의자가 좀 더 효과적 대안이라고 믿었다. 무슬림은 이슬람주의자의 청렴함에 감명받았고, 세속주의 정권의 실책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에 통쾌함을 느꼈다. 또한, 하마스 같은 이슬람주의자는 누군가 자살폭파 때문에 사망하더라도 남은 가족의 생계와 건강을 돌봐주고 최빈곤층 자녀에게 무상 초등교육을 제공하는 등의 정책을 썼다.
하지만 이슬람주의자 역시 대중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민생복지에 힘쓰지 않고 군사적 모험만을 감행한다면 세속주의자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무슬림 유권자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도 아니다. 그들은 정부의 탄압과 부패, 무능함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정치인을 내쫓으려는 의지도 있다.
이슬람 모스크는 민주주의의 요람인가 아니면 호전주의의 발상지인가? 모스크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한 것으로 보인다. 지하디스트는 대원을 모집하거나 각종 전략전술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에 모인다. 거의 모든 사람이 특정 모스크에서 "부름"을 받고 그 모스크를 중심으로 지속적 교류를 나눈다. 9.11 자살공격 대원이 처음 지하드주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유럽 모스크 내 회합이었다.
대다수의 모스크는 순수하게 종교 의례를 거행하고 참배와 명상을 위한 장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많은 사제가 정치적, 종교적 반체제인사를 모스크에 수용하고 극단주의자가 피신할 수있도록 허용한 것 또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수사 뒤에 감춰진 정치적, 사회적 목적이나 열망을 파악하는 것이다. 종교적 수사는 체제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나 조직이 "가까운 적" 과 "멀리 있는 적" 모두에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기이다. 이슬람은 세속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이들을 지원해왔다. 세속 민족주의는 이미 수십년 동안 시민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 파탄과 군사적 패배를 가져왔다. 지하디스트들은 1967년 아랍 세계가 이스라엘에 패했던 사건을 기점으로 "변절한" 지도자에 대한 저항이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무장 이슬람주의로 재무장한 지하디스트는 실패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부패한" 서구 자유주의에 대항해 전면전을 선언했다. 이들은 무능한 무슬림 지배자를 내쫓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종교가 정치를 위한 도구가 된 셈이다.
지하디스트의 투쟁은 종교가 아닌, 정치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꾸란에서 테러리즘을 장려한다는 비난은 신약성서에서 십자군을 장려한다는 비난처럼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는 수많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같은 구절이라도 평화와 관용을 도모하는 것으로도, 전쟁과 편협을 부추기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문제는 종교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무슬림과 "이슬람주의자"는 이슬람이 ㅁ웟인지에 대한 견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이슬람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무슬림은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평신도지만, 이슬람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은 권력을 장악해 국가와 사회 전체를 위로부터 이슬람화하는 것이다. 지하디스트에도 많은 부류가 있듯, 이슬람주의자 중에서도 온건주의에서 주류 이슬람주의, 호전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조직이 존재한다. 수니 Sunni, 시아 Shiite, 살라피 Salafi, 수피 Sufi, 와하비 Wahhabi 파 등은 부족(오늘날은 국가)과 철학적 전통 (어떤 종교 문구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 차) 에 따라 분류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이슬람주의는 대부분 수니파이다. 사우디에는 살라피와 와하비파가 혼재되어 있고 이란 이슬람주의는 대부분 시아파이다. 종파들은 여러 방식으로 교차하고, 상호 영향을 주며, 결속하거나 분리되기도 한다. 특정 종파는 다른 종파에 비해 더 배타적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법 Shariah 에 따라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정부를 수립하려는 공통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이 목적 외에 '이슬람' 외교 정책이나 '이슬람' 경제 정책에 대한 종파 간 합의가 부재하여 구체적 사회 모델도 제시하지 못했다.
무장 이슬람주의자, 지하디스트들의 시각은 급진 좌파에서 급진 우파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하다. 놀랍게도, 그들의 견해는 자신들이 반대하는 세속주의 지도자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슬람은 무슬림의 도덕성, 정체성, 서구화와 미국화에 대한 두려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는 이슬람을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 종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란, 수단, 과거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가 궁극적으로 건립하고자 하는 정권 역시 세속주의 독재정권만큼이나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적 수사와 상징이 넘쳐나지만, 이들의 내부 통치체제에서 특별히 이슬람의 고유한 요소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란인과 수단인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경제난을 우려하고 있고 이슬람학자와 이슬람주의자가 조장하는 사회정치적 불안정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탈레반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정권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초기 단계의 정부마저 붕괴시켰다. 이는 이슬람 국가 건설 가능성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란, 수단, 아프가니스탄 같은 국가들은 이웃 국가와 다른 지역에 혁명을 파급하는 데 자신의 빈약한 자원을 소진해 버렸다. 혁명을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려 했던 시도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특히 국제화된 지하드를 목표로 하는 알 카에다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탈레반은 치명타를 입었다. 9.11 이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정권 통치하에 있는 이란, 수단 정부는 내부적으로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더 번째 역설은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가 무슬림 세게에서 정치적 공방과 논의를 심화시키는 데 간접적이지만 적극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터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의 세속적 전제군주에게 정치 체제를 개방하고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가 없었다면, 아랍 세속주의 독재자는 결코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의지를 갖추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디스트는 서구 민주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의도와 다르게 아랍 지역 내 민주적 변화를 주도했다. 심지어 일부 이슬람주의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더 광범위한 개혁을 주장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드 조직인 알 자마 알 이슬라미야 (Al-Jama'a al-Islamiya)와 알제리의 이슬람 구국 전선(Islamic Salvation Front)은 현재 민주화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됐다.
그러나 민주화를 주장하기까지 이들이 거쳐 온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피로 점철된 역사였다. 그들은 가부장적이고 스스로 신앙, 전통, 그리고 정통의 수호자라고 자신한다. 주류 이슬람주의자조차 여성의 권리 신장이나 예술가의 표현 자유에 반대했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주의자는 여성의 투표권이나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튀니지, 알제리, 파키스탄, 다른 무슬림 국가의 이슬람주의자는 여성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을 할 수 있는 권리, 남성의 승인없이 여행하는 권리, 의회나 정부 기관에서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 법률 제정을 반대한다.
많은 이슬람주의자, 지하디스트가 세속주의와 타협하고 자신의 견해를 재고하고 있다. 무슬림 사회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종교보다는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고, 전제적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적 소환(Da'wa)을 통해 아래로부터 점진적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보수적 "신 원리주의" 가 권력쟁취를 통해 위로부터 급진적으로 사회를 이슬람화하는 혁명적 지하드주의를 서서히 대체했다. 그러나 이는 알 카에다를 포함한 호전주의 세력과의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알 카에다에게 이라크 전쟁은 행운이었다. 내부 혼란에 대한 우려를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투쟁에 신뢰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사건이었다. 미국 관료들 역시 이라크 전쟁이 결과적으로 알 카에다가 신병을 모집하고 조직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사회의 급진적 이슬람화를 추구했던 세력이 둔화하는 추세를 바꿀 수 없었다.
지하디스트가 국제 사회와 일반 무슬림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일부에서는 노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일부 소조직이나 분파가 자행하는 테러리즘은 계속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테러리즘이 더 넓은 지지층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은신처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하디스트는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을 자극해 이슬람 공동체가 피해를 봤다는 비난을 국내외로부터 받고 있다. 오로지 기적만이 지하드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혹자는 이라크가 계속 점령지로 남는다면, 그것이 기적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 Fawaz A. Gerges "Journey of the Jihadist: Inside Muslim Milita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