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bert Sustris - Liggende Venus 1550
아레티노의 풍자시 가운데 하나는 외국인들이 로마에 여드레나 열흘 정도 있으면서 "옛날 것"을 본 뒤에는 "요즘 것"을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묘사하는 내용이 있다. (Partner. Renaissance Rome) 여기에서 요즘 것이란 고급 창부를 의미했다.
고급 창부는 로마의 특징 중 하나로, 모든 방문객이 이들에 대해 언급했고, 많은 방문객이 찾아갔다. 이들은 특수한 형태의 사치품이었으며, 로마의 부와 화려함, 성적 불균형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로마에서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은 약 6대 4였다. 로마만큼이나 고급 창부들이 두드러졌던 베네치아에서는 그 비율이 약 7대 6이었으며, 반대로 그들이 거의 중요하지 않았던 피렌체에서는 약 4대 5였다.
로마의 성적 불균형은 사제들이 집결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태평했던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고급 창부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젊은 귀족과 부유한 방문객도 그들을 자주 찾았으며, 그들은 종교개혁에 대항한 가톨릭 내부 개혁으로 인해 성직자의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도 성매매의 수요를 유지해 주었다. – Masson, Courtesans.
성공한 고급 창부는 마차를 한 대 갖고 있었고, 세련된 집과 많은 가구를 갖추고 살았으며, 우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반드시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신의 책들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창부는 심지어 바닥에 양탄자를 깔았는데, 이는 당시에 드문 일이었다. 에스파냐 대사가 유명한 고급 창부인 임페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양탄자가 더러워질까봐 양탄자 대신 하인에게 침을 뱉었으며, 임페리아는 그의 배려를 고맙게 여겼다고 한다. – Delumeau, Vie economique.
몽테뉴 또한 그의 [여행록]에서 1581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설교를 경청하고 고대의 유물을 보고 정원, 포도밭, 오락 장소를 살펴본 후, 고급 창부를 찾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매매가 아니라 대화를 위해 방문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대화만 했다 할지라도 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이들은 화려한 차림으로 교회에 왔으며, 말쑥한 복장의 젊은 구애자를 동반해 앞쪽의 의자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산타고스티노 교회에, 이후에는 로마에서 가장 새롭고 상류층 인사들이 많이 몰리는 교회에 다녔다. 고급 창부 중에는 고객과 가깝다는 명백한 이유로 산피에트로 성당과 바티칸에 인접한 보르고에 사는 이들이 많았다.
가톨릭 내부개혁 시기에 고급 창부들을 모두 추방하려는 노력이 잠깐 있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들을 포폴로 광장 주변의 캄포 마르초 지역에 있는 한 구역에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보다 성공적이었다. 1599년 인구조사를 보면 801명의 직업 고급 창부 중 438명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