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코시취우쉬코의 봉기에서 1863년 1월 봉기에 이르기까지 슐라흐타와 애국적 인텔리겐챠가 주도한 낭만적 민족운동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 이 4차례의 민족봉기가 결론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19세기의 민족운동을 그 출발점에서부터 규정한 폴란드 슐라흐타의 계급적 이기주의와 배타주의는 운동을 닫힌 구조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이들은 민족 구성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계급을 끌어들여 민족운동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실패했다. 서구 열강의 무력간섭에 기대어 독립을 회복하겠다는 온건파의 발상은 아이디어의 빈곤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사회개혁적 전망을 결여한 데서 온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프랑스의 부르주아가 민족 개념을 제3신분 전체로까지 확대하고 봉건제 타도의 개혁강령을 제시함으로써 수직축에서의 진보적 민족통합을 이룩한 것과 명백히 대조적이다. 19세기 크로아티아의 민족운동에서도 드러나듯이, 봉건귀족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은 결국 자신들의 계급적 이기주의 때문에 <인민> 을 포괄하는 근대적 국민국가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결여함으로써 수직축에서의 진보적 민족통합을 이루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2. 봉건귀족의 민족운동이 지닌 구조적 취약성과 폐쇄성은 운동의 이념적 측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동유의 민족운동에서 민족의 과거에 대한 낭만적 이상화나 비합리성으로 무장한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이념적 요소들을 지적한 한스 콘이나 헤이즈의 주장은 이 점에서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서유럽과의 문화적 혹은 사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봉건귀족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이 지닐 수 밖에 없는 계급적 한계와 구조적 취약성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개혁적 사회강령으로 기층민중을 끌어들일 수 없었던 이들에게 남겨진 대안은 혈통, 언어, 종교, 문화 등 민족 형성의 객관적 동질성의 신화에 호소하는 길뿐이었다. 그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해방의 메시지를 유보하면서도 즉 봉건귀족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기층민중을 민족투쟁에 동원할 수 있는 이념적 방편이었다. 물론 민족적 메시아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 혹은 유토피아 사상과 결합됨으로써 운동의 조건 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진보적 이념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따라서 동유럽의 낭만적 민족주의가 갖는 이념적 보수성에 대한 한스 콘 등의 비판은 일반화의 수준이 아니라, 봉건귀족이 주도한 민족운동에 한해서만 유효할 뿐이다.


3. 봉건사회의 또 다른 대안 세력인 농민 계급이 봉건귀족을 대신하여 민족운동의 주체로 나선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소규모 농지에 뿌리박은 자기 충족적 경제생활, 자기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뿌리깊은 애착 등은 농민들에게 지방적 충성심의 차원을 넘어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농민들은 <정치적 민족>의 궤도 바깥에 존재했던 것이다. 더욱이 봉건귀족과의 계급적 대립은 이들을 농노신분에서 해방시켜 준 이민족 황제의 편에 서게 했고, <군주정의 수호자 monarchy-dobrocz-ynczy>로 만들었다. 요컨대 폴란드 농민들의 의식은 촌락공동체에 대한 충성이라는 파편화된 분궍의와 이민족 황제에 대한 충성이라는 제국적 보편주의에 묶여 있었다. 이것은 19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아래서 농민민족주의를 발전시킨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경우와 대조적인데, 발칸의 농민민족주의야말로 오히려 예외가 닐까 한다. 즉 그것은 토착 봉건귀족 대신 이민족 국가가 직접 지주의 역할을 했던 지역적 특수성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오스만 투르크의 국가농노제에 대한 발칸 농민들의 계급투쟁은 자연스럽게 민족투쟁으로 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이상의 구도에서 볼 떄, 봉건제가 엄연히 사회적 총관계의 기본 질서로 존재하는 한 민족운동이 기층민중을 아우르는 열린 운동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19세기의 낭만적 민족운동에서 나타난 폴란드 봉건귀족의 특권적 애국주의와 농민 계급의 비민족적 계급의식은 봉건사회에서 그들 각자가 처한 사회적 존재 조건으로 미루어 볼 때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혈통, 언어, 종교, 문화와 같은 민족형성의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지고 또 그것에 호소하여 민족투쟁의 공동전선을 펼치고자 했던 애국적 인텔리겐챠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민족운동은 기본적으로 봉건제적 사회질서가 규정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봉건적 사회 관계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근대적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민족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며,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다양한 민족 성원 각자가 능동적 민족의식을 지닌 <정치적 민족>으로 발돋움하기를 기대하기란 더욱 힘든 것이었다. 


5. 일반적 차원에서 민족의식이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들의 지방적 애국주의를 대체하게 된 것은 산업화가 진전되어 농민층의 도시 이주가 시작되고 의무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이 주입되는 등 이들이 근대의 사회적 존재 조건에 처하게 된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질의 측면에서 민족운동의 구조와 논리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적 총관계인 것이다. 기타 각각의 국면마다 민족운동이 처해 있는 특수한 조건들은 주로 부차적 측면에서 민족운동을 양적으로 규정할 뿐이다. .폴란드 민족운동의 특수성 또한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총관계의 질적 규정력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1월봉기를 끝으로 이제 폴란드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것이었다. 1월봉기 자체는 패배로 끝났지만, 그 부산물인 농노해방으로 폴란드는 봉건제의 낡은 껍질을 벗고 산업사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여전히 이민족 지배의 멍에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사회 구성의 근본적 변화는 민족운동의 결을 바꾸어 놓을 것이었다. 진정한 민족해방은 폴란드의 민족운동이 <귀족-민족>의 낡은 틀을 깨고 <민중-민족>의 대안을 향해 힘차게 진군할 때 비로고 가능한 것이었다. 폴란드인들이 떠메고 가야만 했던 역사의 무게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희망의 불빛이 보일 떄 그 역사의 짐은 훨씬 가볍게 느껴질 수 있었다. 



  -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임지현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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