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what comes down doesn’t go up
선진국 정치계에서, 새로운 적은 바로 경제가 되었다. 지난 7여년 간, 허술한 규제들을 농락하던 부도덕한 은행가들이 악당이었다면, 이제는 끔찍한 보수에 고통받는 정직한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인색한 보스들이 주적으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강한 조합의 권리를, 많은 이익을 거두지만 적은 보수를 주는 식음료업계를 상대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CEO 들이 평균적 노동자들보다 300배나 많은 보수를 받는다는 사실을 규탄하며 “everyday Americans” 캠페인을 시작했다. 영국의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번드는 유권자들이 '포식자' 자본주의자들을 심판할 것을 요청했으며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총리는 자신들이 '일하는 사람들의 당' 이라고 반박했다. 일본 신조 아베 총리는 기업가들로 하여금 임금을 인상할 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런 레토릭들은 분명한 공명이 있었다. 전 세계 대부분에서 금융공황은 임금에 지독한 악영향을 끼쳤다. 지난 5년간의 경기 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에서 실질 임금은 2009년 대비 오히려 1.2% 하락했다. 영국에서도 실질임금은 2009년부터 2014년 기간 매년 하락하여 1900년대 중반 이후로 가장 긴 침체를 기록했다. 2014년 노동소득의 중간값은 2008년의 10%나 떨어졌다. 유로존의 위기에서 유일하게 선방한 독일에서도 임금은 2008년 대비 2.4% 하락했다. 유이한 예외가 바로 캐나다와 프랑스였지만 임금소득이 매우 부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Sin of wages
정체 혹은 하락하는 임금소득은 단지 고통받는 가구나,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다. 노동자는 또한 소비자이기도 하다. G7 국가들에서 가구소비는 GDP 의 55% (프랑스) 에서 68% (미국) 에 달한다. 만약 모든 개인기업가들이 임금을 깎는다면 저임금은 필연적으로 경기 전반을 압박할 것이고, 가계는 부채에 시달리거나 지속가능하지 않은 지출구조에 처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인데, 불황기 이전에도, 임금은 생산성을 제대로 따라간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제 2차대전 직후 1960년때까지는 둘이 함께 상승 (51%)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둘은 분리되기 시작하여, 생산성이 220% 증가하는 동안 실질 임금은 100% 이하로 증가했다. 그 결과는 GDP 에서 노동자의 몫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나머지는 최고 수준의 급여를 받는 층에 더 쏠리기 시작했고, 문제를 악화시켰다.
학자들은 이러한 노동소득 지분의 저하를 몇몇 큰 요소들에서 찾기 시작했다. 하나는 자본소득 - 특히 주택임대 - 이 노동소득을 앞지르기 시작한 점이다. 또 다른 요인은 자본재가 더 저렴해지고 나아지기 시작한 추세이다. 기업가들은 노동자 대신 더 생산성 있고 저렴한 기계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동수요와 임금압력을 낮추었다. 세계화 또한 선진국들의 노동수요를 감소시켰다. 에딘버러 대학의 Michael Elsby와 연방준비위원회의 Bart Hobijn and Aysegul Sahin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993년에서 2010년 간에 수입이 공급체인을 많이 대체한 산업일수록 노동자들의 지분이 가장 많이 낮아졌다. 노동조합의 감소도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 1960년 이후 미국 노동조합의 힘은 매년 감소해왔으며 이는 G7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황 이후 임금소득 성장의 부진을 불러온 숨은 요인은 좀 더 복잡한데, 과거의 경제학자들은 이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실업'으로 보았다. 실업이 일단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괜찮은 인력을 구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구인시장은 달아오르며, 결국 새로운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을 것이라는 가정이 일반적이었다. 실업률은 보통 낮고, 임금상승압력이 인플레이션을 주도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물가안정실업률 NAIRU 을 계산하는 일이, 중앙은행들의 주 역할 중 하나였다.
Matching quandaries
대침체 이후로, NAIRU 는 종종 상승했다. 실업의 시기는 활기의 손상으로부터 장기적 침체로 이끄는 영향을 미쳤다. 직장에서 떨어져 있는 기간은 기술의 쇠퇴와 시장에서의 필요와의 미스매치로 이어졌다. 경기회복기의 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산업의 중심부로부터 슬럼프 시기에 해고된 사람들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이렇기 때문에 일단 해고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다시 직장에 복귀하기 어렵게 되었음을 깨닫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연금수령연령까지도 비고용상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게 되고, 결국 그들의 지속적인 비고용상태는 임금을 끌어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불황 이후 NAIRU 는 상승했고, 인플레이션은 곧 뒤따를 것이었다.
현재의 침체에 뒤이어, 여러 경험칙들이 많은 나라들에서 뒤집혀갔다. 2013년 OECD는, 영국에서 실업률이 6.9% 이하로 유지된다면 임금 주도 인플레이션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2014년 실질임금은 오히려 0.6% 하락했다. 2013년 연방준비위원회의 경제학자들은 안정적인 고용이 0.3%의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실업률이 2% 하락했음에도 임금의 중간값은 그 이상 하락했다. 일본에서 2014년 실업률은 공황 이전 수준인 3.6%를 회복했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2.5% 하락했다.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지만, 그것이 일시적이라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다. 실질임금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근거들도 있다. 지난 2월 독일 최대 노조인 IG Metall은 현재 인플레이션 0.3%를 뛰어넘는 3.4%의 임금인상을 합의했다. 영국의 최근 데이터는, 인플레이션율이 사실상 제로에 가까움에도 평균 월급이 1.7% 상승했다는 자료가 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는데, 임금 충돌에 대한 최근의 힌트는 예상치 못한 저인플레이션의 인공적 창조물이다. 미국과 영국의 평균 임금 데이터는, 수요가 많은 중위 노동자의 고통을 감추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이 침체가 노동시장에 남긴 손상 - 숙련의 손실과, 산업 수요/경력의 불일치 - 이 장기간의 비고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징후일 수 있다. 이 가정대로라면 저임금은 더욱 고정되고,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은 저실업률 상황에서도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그 노동시장 전환은, 인플레이션율을 견제하고자 하는 중앙은행에게는 새로운 도전일 것이며, 또한 저임금의 정치가 등장해야 할 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냈는가. 하나의 유력한 트렌드는, 임금을 올리지 않고도 포스트를 쉽게 채우곤 하는, 비정규직 고용의 증가이다. 독일에서 400유로 미만의 월급을 받는 '미니 잡'이 급증했고, 영국에서는 근무 시간을 특정하지 않는 'zero hour' 계약이 유행하고 있다. 해고를 쉽게 만든 사회 구조는 고용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대신 노동자의 위치를 취약하게 만들고 협상력을 깎아내리고 있다.
Not for the long h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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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저임금 직종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없느니만 못한 직장은 분명 (적지 않게) 존재한다. 반사회적, 폭력적 직업 그리고 인적자원에 손해를 끼치는 유해하거나 위험한 직종들인데,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그걸 인력으로 갈아엎고 메꾸는 '일자리를 창출' 해 냈고, 좀 더 과거로 올라가면 런던 페스트도 수십만의 검시관 / 시체처리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고 디킨스는 적고 있다. 이게 '없는 것보다는 나은 일자리' 는 아닌 것이다.
이 기사에서 이코노미스트는 또한, 노동은 빈곤을 벗어나는 길이 되어야지 빈곤에 갇힌 채 머물러선 안 된다고 하면서 (여기까지는 지극히 옳다!) 도 정치가 저임금을 규제하는 데 개입하는 과정에서 경제 성장의 동력을 꺼트릴 정도로 위험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임금 인상이 주가를 올리고 보드 멤버에게 엄청난 사이닝 보너스를 지급하고 회사채를 상환하고 세금을 지급한 다음에도 향후년도 실적전망이 튼튼할 것임을 수 년 이상 확신한 다음에야 가장 나중에 마지 못해 수혜처럼 말석을 내주는 원칙이 그것인가? 양차대전 이후 전 세계적 경제 성장이 어디에 흘러가고 어디에 귀착되며 누구에게 유통되는가에 대해서는 이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번 돈이란 언제는 쓰일 것이고, 결국 언제 누군가에게 쓰이느냐의 문제이다. 그게 경제성장의 이유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