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4세가 1821년 보기 흉하 두피낭종을 외과적으로 절제하기로 결정했을 떄, 그는 간단한 수술로 인해 목숨이 위험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지가 살던 시대에는 그가 계획한 종류의 시술에 따르는 사망률이 오늘날의 심장절개 수술로 인한 사망률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 무지막지한 살인자는 수술 후 감염이었다. 모든 외과의사들이 치료를 하려고 메스를 집어들 때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그 유령이 의식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들의 꿈속에 나타났다. 그 당시에 의사가 된다는 것은 수술 현장의 날카로운 비명과 몸부림뿐만 아니라 수술실 공기를 더럽히는 부패한 살에서 나는 구역질나는 냄새에 단련된다는 의미였다.

 

요즘에야 순식간에 스며드는 단도의 염증이 우리가 연쇄상 구균이라 부르는 둥근 사슬 모양 세균의 독성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쿠퍼의 시대에 그 질병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딱 한 가지, 발작이 환자의 베인 상처 조직에 빠른 속도로 번진다는 것이었다. 일단 증상이 시작되면 신의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병의 진행은 막을 길이 없었다. 아무도 수술 중 생긴 상처에서 왜 단독이 생기는지 알지 못했고, 그것을 예방하는 방법도 몰랐으며, 그 엄청나게 빠른 진행 속도를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수술 후 감염은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점차 골칫거리가 되어갔다. 상처 감염은 너무 일반적인 합병증이라 수술이 끝나면 환자들과 의사들은 으레 고름을 예상하게 되었다. 가끔은 약간의 염증도 없이 깨끗하게 나아서 관찰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상처들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고 그 원인도 설명할 수 없었다. 환자가 운이 좋으면, 상처가 난 자리만 곪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에는 5~6일 내에 냄새가 없는 걸쭉한 크림색 분비물이 상처 가장자리를 통해 밖으로 흐른 다음 차차 건강한 반흔 조직과 함께 상처를 메웠다. 이런 고름은 '건전한 고름'이라고 불리며 손꼽아 기다려지는 대상이었다.

 

훗날 그 건전한 고름은 포도상 구균의 활동으로 생긴 것이라고 밝혀지게 된다. 주로 상처 깊숙한 곳에 잠복하는 다른 세균 침입자들과 비교했을 때 포도상 구균은 19세기 외과의사들의 친구라 할 수 있었다. 반면 연쇄상 구균은 고름과 함께 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그 유해한 것을 빼낼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관목 지대의 화재처럼 원형으로 퍼지며, 유독물질을 혈류로 미리 보내는 악성 세균이었다. 죽음의 징조와 마찬가지로 그 독소 자체는 고열과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의 오한으로 알 수 있었다. 의사들은 그 증후군을 단독이라 불렀지만 환자들은 성 안토니오의 불 St. Anthony's Fire 이라 불렀다.

 

그러나 희생자 모두에게 끔찍한 죽음을 선고하는 또 다른 형태의 감염이 있었다. 병원 괴저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악취가 나고 메스꺼운 부패 작용이었다. 그 감염은 여러 세균들이 뒤섞인 결과였다. 그 세균들 중 일부는 지금 우리가 혐기성 세균이라 부르는 것들인데, 산소가 없는 곳이 그 세균에게 최고의 번식 환경이라 무기력한 숙주의 조직 깊숙이 침입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죽였고, 코를 찌르는 악취를 만들어 여러 세대에 걸쳐 유럽과 미국의 외과의사들의 옷에 배었다.

 

어떤 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미생물 집단이나 그 미생물을 포함하고 있는 핏덩어리가 언제라도 감염된 상처에서 혈관으로 들어가서 패혈증과 농혈증이라 불리는 혈액 중독을 일으켜 문제를 악화시킬 수도 있었다. 수술 후 감염된 자궁에서 발생하는 단독이나 패혈증, 또는 농혈증은 산욕열 환자들을 손을 씻지 않은 산부인과 의사들의 희생물로 만든 전염병이다. 또한 항상 파상풍의 위험이 존재했다.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이나 농장에서 생긴 사고에서는 더 흔한 병이었지만, 파상풍은 대도시 병원 건물에서 수술을 한 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1867년, 클로로포름 마취제의 발명자인 에든버러의 제임스 심슨 경은 "병원 제도 Hospitalism"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런 수술에 대한 실망스러운 통계 자료를 제시했다. 영국에서 병원에 입원 중인 사지 절단 수술 환자 2천명 이상의 결과를 조사행서 300개 이상의 병상이 있는 병원에서 수술이 이루어졌을 경우 41%의 환자들이 사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감염은 단연 가장 주된 사망 원인이었다. 병원 밖에서 절단 수술이 이루어진 다른 환자 200명 중에서는 11%만이 사망했다. 수술 후 사망률 숫자는 유럽의 모든 병원에서 높게 보고되었다. 파리는 60%, 취리히 46%, 글래스고 34%였고, 베를린, 뮌헨, 코펜하겐, 다른 도시들도 그와 비슷했다.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절단 수술 환자 사망률은 26%, 펜실베이니아 병원은 24%로 보고되었다. 심슨의 경고는 정확했다. "우리나라 외과 병원 중 한 곳의 수술대 위에 누운 사람은 워털루 전투의 영국 군인들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다" 패혈증으로 인한 높은 사망률 때문에 몇몇 유럽 도시에서는 가장 평한이 안 좋은 병원들이 철거되었다.

 

감염 위험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체 내부의 수술은 불가능했다. 수술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했고, 사지 절단 그리고 가슴과 체벽의 종양 제거에만 국한되었다. 1847년과 1870년 사이에 메사추세츠 종합 병원에서 시행된 수술 1,924건 다운데 1,098건은 절단 수술, 237건은 가슴 종양이며, 나머지는 거의 모두 비교적 덜 중요한 신체 부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감염률은 모든 집단에서 높게 나타났고, 사망률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프레데릭 트레비스 Frederick Treves 경이 1870년대 초 [오래된 응접실 Old Receiving Room]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묘사하는 런던의 병원 수술실 모습이다.

 

"치료는 매우 거칠었다. 외과의사도 거칠었다. 그는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던 시절, 고통에 냉담할 뿐만 아니라, 거칠고, 강하고, 재빨라야 했던 시절의 태도를 답습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것으로, 질병의 유감스러운 측면이었다.

수술실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또 밤이나 낮이나 항상 불이 켜 있는 난로가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부터 했던 대로, 지혈을 할 때 사용하는 인두를 달구기 위해 항상 불을 준비해 놓는 것이었다. 패혈증은 병실에서 일반적인 병이었다. 사실 심각한 상처는 모두 곪는다고 볼 수 있었다. 고름은 가장 흔한 대화 주제였다. 외과의사의 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녹색 빛이 나는 묽은 고름은 보기에도 좋지 않았을 뿐더러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장액성(漿液性)' 고름은 가장 심각한 상태의 고름이었다.

청결함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어울리지 않았다. 외과의사는 도살장을 연상시키는 검정색 프록코트를 입고 수술을 했다. 그것은 몇 년 간 말라붙은 피와 오물로 인해 뻣뻣했다. 코트가 더 많이 축축할수록 그 외과의사가 유능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상처는 기름에 적신 붕대로 감았다. 기름과 붕대는 솔직히 말해 오염된 것이었다. 붕대는 버려진 리넨에서 얻은 폐기된 면사의 일종이었다.

병실에는 스펀지가 하나 있었다. 그 악취가 나는 물건과 한때는 깨끗했던 대야의 물로 하루에 두 번씩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들의 상처를 닦았다. 이 때문에 환자가 회복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병원 괴저로 모든 병실에서 많은 환자들이 사망했다."

 

이때까지 현미경은 기대했던 것만큼 과학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7세기 초 현미경을 이용해 "온통 털과 무척 날카로운 발톱으로 뒤덮인, 양처럼 큰 파리" 를 보았다는 갈릴레오의 이야기는 사실 아무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나중에 안톤 반 레벤후크가 직접 설계하고 만든 우수한 렌즈를 이용해서 그가 극미동물이라 부르고 우리가 지금 세균이라고 부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잠시 1660년 마르첼로 말피기의 모세혈관 증명을 포함해서 현미경에 의한 발견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확대 시스템은 일그러진 상을 만들어내기 일쑤였고, 18세기 내내 현미경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의 원인이 되었다. 현미경의 배율이 높아질수록 렌즈의 둥근 모양과 보통의 빛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깔로 분산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고배율 현미경을 사용할 수 있도록 수차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1826년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바티스타 아미치가 발명한 유침대물렌즈였다. 그것은 굴절력이 다른 매개체를 통과한 빛이 인간의 눈과 동일한 방식으로 수차를 발생시킨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글래스고 대학의 외과교수 조셉 리스터는 산소가 고름의 부패 작용을 일으킨다는 당대의 개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 개념을 주장하려면 건강한 육체가 저절로 감염되어야 했다. 게다가 그의 경험상 골절된 늑골이 폐에 구멍을 내어 공기가 상처로 들어가게 했을 때 흉부 감염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상처로 들어오는 어떤 이물질이 원인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루이 파스퇴르가 그 세상을 처음으로 탐험한 사람은 아니다. 옛날부터 언젠가 '전염성 생물 contagium animatum'이 발견되고, 이것이 질병의 원인을 설명하게 될 거라는 이론을 세운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인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리우스 Girolamo Fracastorius는 1546년 '보이지 않는' 병원체를 예견하기까지 했다. 1676년 레벤후크는 런던 왕립학회에 보낸 편지들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극미동물'을 설명했다. 그는 물에서, 그리고 물에 잠긴 유기물질에서 나중에는 자신의 어금니 부스러기에서 이 생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연쇄상구균, 간균, 나선균이라고 알고 있는 세균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질병 대문에 배출되는 물질에서 애써 그러한 세균을 찾느라 수고한 사람이 없었다.

 

그후, 루이 파스퇴르는 그 세균들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자연발생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1857년과 1859년에 발표 실험의 결과와 추적 연구 결과를 프랑스 과학원 학술지 Compte Rendu de l'Academie des Sciences 에 발표했다. 조셉 리스터는 파스퇴르의 논문들을 읽고 또 읽고, "인체 조직에 심각한 해를 끼치지 않는 물질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면, 이미 그 안에 있는 세균들을 죽이게 될 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균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조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면 산소를 포함한 공기가 자유롭게 상처에 닿더라도 부패 작용을 막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소독을 위한 독으로, 인근의 칼라일 Carlisle 에서 도시 쓰레기의 악취 제거에 사용하던 석탄산을 선택했다.

 

그는 1865년 8월 12일, 짐수레 마차에 치여 골절된 경골이 피부를 뚫고 나와 다리에 4cm x 2cm 정도의 상처가 생긴 소년을 치료하는데 석탄산에 담갔던 리넨 붕대를 사용했다. 치료에는 6주가 걸렸고, 리스터의 첫 임상시험은 성공이었다.

경험이 쌓여 감에 따라 리스터는 석탄산을 상처만이 아니라 의료진의 손은 물론 모든 수술기구에도 사용했다. 수술 후 관리는 주기적 붕대 교체로 이루어졌고, 붕대를 가는 동안 상처에 닿는 모든 것은 소독액으로 가득한 공기 환경에서 다시 소독되었다.

"소독을 하기 전, 35명 중 16명 사망, 소독을 한 기간 동안 40명 중 6명 사망"

 

글래스고 밖의 다른 영국 외과의사들은 아직 소독법이나 그것의 바탕이 되는 원리인, 세균이 어떤 질병과 조직 부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이 무렵에는, 감염된 상처에서 세균을 발견한 것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균이 감염의 원인이라기보다 부패 작용이 시작된 후에 상처에 들어간 이차적인 침입자라고 믿었다. 다른 회의론자들은 세균이 무해한 오염 물질이라고 여겨 그것이 감염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리스터가 복합 골절과 농양, 절단 수술의 치료 결과를 개선한 것에도 수긍하지 않았다.

 

세균 이론에 관한 기사는 그 당시 미국 의학 잡지에 드물게 실릴 뿐이었다. 미국 내과의사들에 따르면, 세균이 질병의 원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는 아직 명확한 답이 없는 실정이었다. 미국 의학 사상에 있어 과학은 아직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비롯된 의학 사상은 전부 외국의 영향을 받은, 어딘지 수상스러운 기색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렵 대륙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특히 독일어권 외과의사들은 미국인들보다 세균이 감염의 원인이라는 개념을 믿을 준비가 훨씬 더 잘 되어 있었다. 일단 세균 이론이 받아들여지자 소독법이나 그와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선구자들 중 한 명인 뮌헨의 리터 폰 누스바움 Ritter von Nussbaum 은 리스터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잇달아 놀라고 있습니다. 병원 괴저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병원의 수술 결과는 갈수록 좋아지고, 치료 시간은 짧아지고 있으며, 농혈증과 단독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과학사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것처럼, 혁신이 등장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 것은 전쟁의 비극이었다. 짧았지만 격렬했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 때 소독법을 사용한 몇몇 외과의사들은 자신들의 환자 사망률이 대다수 동료들의 환자 사망률보다 훨씬 더 낮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연이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Schleswig Holestein 군과 하노버 군의 의무감을 지낸 조지 프리드리히 루이스 슈트로마이어 George Fredrich Louis Stromeyer는 절대 무능한 의사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집도한 환자들의 수술 후 사망률은 무시무시했다. 무릎 관절을 절단한 환자 36명 전원이 사망했다. 프랑스의 통계 자료도 칭찬받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절단 수술 13,173건이 프랑스 육군 병원에서 시행되었는데 무려 10,006명이 사망했다.

 

영국 버밍엄 미들랜드의 외과의사 로손 데이트는 1887년 영국의사협회 연설에서 "저는 세균 같은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자신이 수술한 환자들의 사망률이 낮은 이유는 배액관과 흡수성 붕대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의 본능 덕분이라고 했다 데이트는 수술 전 꼼꼼하게 손을 씻고 충분한 양의 세제와 뜨거운 물로 수술 기구들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비웃던 바로 그 이론인 무균법 예방 처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은 독일 외과 수술 환경에 스며들기 시작한 강력하고 압도적 동향에 저항하고 있었다. 소독법과 마취 덕분에 가능해진 수술은 새로운 방식을 이용해서 꼼꼼하고 신중하게 실행하는 것이 예전처럼 속도의 현란한 손재주를 강조하는 것을 대체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더 이상 산소가 상처로 들어가 곪기 전에 그리고 발버둥치는 환자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건강한 조수들에게서 도망치기 전에 30초 만에 다리를 절단할 필요가 없었다.

 

파스퇴르의 계속된 연구가 세균이 전염병을 일으킨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1878년 로버트 코흐 Robert Koch 라는 34세의 독일 세균학자가 처음으로 특정 세균이 특정 질병의 원인임을 밝혀내고 순수 배양한 세균을 다른 동물에게 주입하는 단순하고 분명한 실험으로 탄저병에 걸린 동물 피에서 발견한 간균이 그 병의 병리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병원체임을 입증했다. 1878년, 코흐가 기념비적 논문 [상처 감염의 병인론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여섯 가지 다른 종류의 수술 부위 감염을 여섯 가지 세균과 연결할 수 있었다.

 

이후 사람들은 공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세균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생물은 필연적으로 공기 중에서 떨어지는 미립자기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주된 감염의 명백한 근원은 의료 팀, 즉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손과 수술 기구였다. 상처 감염은 월트 켈리의 인기 만화 주인공 포고Pogo가 말한 것처럼 "적을 만났는데 알고보니 우리였"다.

 

외과의사는 수술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수술 도구는 끓여서 소독해야 하며, 상처를 덮는 천은 세균이 없어야 한다. 석탄산이든 다른 동일한 효과가 있는 약품이든 간에 환자의 피부를 살균제로 소독한 후에 살균한 손으로 쥔 살균한 칼로 절개해야 상처가 감염되지 않는다. 불결한 낡은 프록코트는 새로 세탁한 살균 가운으로 바꿔야 한다. 무균법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  Sherwin B. Nuland  - Doctors: The Biography of Medicine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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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법(이하 금리제한법)은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탄생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유서 깊은 논쟁거리이다. 가장 잘 알려진 논쟁은 바로 애덤스미스와 제러미 벤담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손'의 메타포를 만들어낸 애덤스미스는 흥미롭게도 그 보이는 손이 신용시장까지는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 유명한 저작 '국부론'에서, 높은 이자율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하며 대부분의 자금은 

"높은 이자율을 부담할 의지가 있는 투기자들과 낭비꾼들에게 대부되고, 제정신인 사람들은 대출 경쟁에서 밀려날 것"

“....would be lent to prodigals and projectors, who alone would be willing to give this high interest. Sober people ... would not venture into the competition.“

  이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고율의 이자로 인한 대부 품질의 역선택 효과로 읽을 수 있다. 이 해석의 문제는 스마스는 왜 제정신인 사람들이 먼저 탈락하는지, 왜 대부자가 역선택 효과를 감지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대부자들이 자유 의지로 이자율을 시장 적절 수준 이하로 낮추곤 하는지, 무엇보다 왜 낭비꾼들과 투기자들에게 대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지를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논쟁에 참여한 제러미 벤담 (1790) 은 당연히 그의 동료 경제학자의 리버럴한 전망에 실망했다. 그는 고리대금법은 낭비를 방지하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낭비는, 보안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이자율이 낮으면 더욱 이익을 본다. 게다가 벤담에 따르면 애덤스미스가 말한 투기자들은 혁신가들이다. 그들은 이미 기반이 갖추어진 사업을 하기보다 새로운 시대 상황으로 앞서나가고자 한다. 그들의 그 천성 때문에 혁신적인 거래자들은 높은 리스크와, 그리고 그 때문에 높은 이자율을 부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금리제한법은 대부자들이 합법적인 신용체계를 이용하는 것을 제한함으로써 피해를 입히게 된다. 자금은 법을 피할 수 있지만, 이 경우 대부자는 불법 금융으로 인한 프리미엄을 부담해야 한다. 벤담은 계약자유 원칙에 대한 믿음에 따라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나의 이웃들이, 자유 속에서, 각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조건의 이자율에 따라 자금을 대여하는 계약을 맺는 것을 제한해야 할 이유가 없다."

“My neighborours, being at liberty, have happened to concur among themselves in dealing at a certain rate of interest. I, who have money to lend , and Titus, who wants to borrow it of me, would be glad, the one of us to accept, the other to give, an interest somewhat higher than theirs: Why is the liberty they exercise to be made a pretence for depriving me and Titus of ours”.

 - J. Bentham "In defence of usury"

 

19세기 동안 벤담의 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직업적 정통성을 확립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J.S. 밀은 '원론' (1891) 제 10장에서 금리제한법을 "잘못된 이론에 근거한 정부의 간섭에 대하여" 라는 제목 하에 다루었다. 이러한 규제는 신용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저개발 사회에서 대부자들만의 보호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Marshall, 1920).

 

이 정통성에 대한 중요한 도전은 1936년 케인즈의 일반 이론으로부터였다. 케인즈의 견해에 따르면, 금리는 잠재적으로 엄청난 실제 효과를 불러 오는 핵심적인 통화적 현상이 될 수 있고, 투자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는 조절될 수 있고 조절되어야 한다.

 

"이자율은 사회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억제되지 않을 경우, 적절한 투자를 불러일으키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을 것이다"

“…the rate of interest, unless it is curbed by every instrument at the disposal of society, would rise too high to permit an adequate inducement to investment.”

                                                                         - Keynes, J.M., General Theory, Book VI, Chap. 23.

 

통화공급이 가능한 한, 금리제한법은 부적절한 투자가 일어나는 경향을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허들을 낮춤으로서 맞설 수 있다. 물론 블리츠와 롱이 지적(1968)했듯이, 금리제한법이 늘어나건 줄어들건 투자는 투자의지만이 아니라 자금의 공급에도 달려 있다. 시장의 일부가 거래의 수준을 결정하듯, 간단한 부분균형분석은 자금의 공급이 비탄력적이라면 신용시장에서 거래되는 자본 총량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마셜 경제학의 신봉자인 케인즈는 이 논쟁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의 실업률과 일반균형시스템에 따른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더 많은 투자 수요는 추가 저축을 유발하는 높은 수익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금리 규제로 인해 자금 수지와 추가 투자 자금 조달을 위한 채권 발행 초과 수요가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채권은 현금 잔고 수량에 대한 최선의 대안이며, 이렇게 되면 시나리오는 소득에서의 보통 승수 팽창으로 종료되게 마련이다. 대신 현금 잔고에의 좌절된 수요가 소비 증가로 스며든다면야, 케인즈의 주장이 확실히 정당하게 된다.

 

실업 문제를 무시하고 금리제한법이 정량 할당(Jaffee and Modigliani, 1969)과 리스크 높은 레드라이닝 형태((Blitz and Long, 1968)의 신용할당 - 금리가 자금의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는 균형수준보다 낮게 결정되어 자금의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금융기관 또한 정책당국이 마치 식량을 배급하듯이 자금의 수요자들에게 한정된 자금을 나누어주는 것 - 을 유도하는 대체 효과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배급'은, 가용 신용 감소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비 케인지언적 관점에서도, Keeton은 금리제한법이 있어도 신용시장에서 거래되는 자금의 양이 증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79). 은행이 부여된 각각 대출의 고정비용을 부담하는 경우에는 대부자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큰 대출을 강제할 수 있다. 금리 천정은 은행이 요구하는 대출의 가치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경제사를 통해 금리제한법의 보급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Blitz와 Long (1968)은 금리제한법이, 이자율 자체를 낮추고 또한 고위험 경쟁자들을 시장에서 차단함으로써 주요 대부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Ekelund 등은 공공선택접근 관점에서, 금리제한법은 주로 대형 기관대부자 – 특히 교회 – 들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1989). 그러나 이러한 규제의 보급은 금리제한법이 genuine 시장의 실패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단지 지대추구활동의 결과일 뿐이며, 이는 역사적으로 주요 기관대부자들은 거의 항상 다른 대부자나 대출자보다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볼 필요가 있다.

Ordover와 Weiss 는 무지한 대출과 검색 비용의 유무에 따른 긍정적 후생 효과가 있음을 주장했다(1981). 이 경우는 규제되지 않는 평형이 일부 은행들에게 비효율적으로 높은 금리를 부과하게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Glaeser와 Scheinkman (1998)은 Rawlsian 접근을 취하면서 금리제한법이 부정적인 특유한 일시적 소득 충격에 저항하여 일종의 사회보험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들은 그러한 정책이 금리에 대한 저축 탄력성이 낮을 때 부유한 나라에서 빈곤한 나라로 재화를 재분배하는 거칠지만 효과적인 도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부의 불균형이 심한 나라들에서는 금리 천정이 높아지는 경향이 그 증거이다. 굳이 불법이 아닐지라도, '비양심적인' 이자율에 대한 대중들의 도덕적 비난도 이러한 의식의 반영일 수 있다. 금리제한법의 확장이 좀더 자연스러운 대안, 직접 사회 보험과 재분배 정책보다 나은 정책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금리제한법의 효과에 대한 경험 조사들은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춘다: 전반적인 대출 규모에 대한 효과와, 리스크 감당 성향이 다른 대부자들에 대한 자금 분배 효과. 모든 연구들이 하나같이 금리 천정의 높이는 은행 대출의 위험 정도와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Goudzwaard, 1968, Shay, 1970, Greer, 1974) 결과적으로 고위험 대부자들은 금리 천정이 낮을 때 저위험 대부자들에 비해 자금을 확보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이에 대해 더 나아가, 간단한 경쟁 모델에 기반하여, 대출 총액은 금리 천정의 높이에 연관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지만 이는 부당한 것이다. 이 모델에 대한 실증 연구 결과들은 서로 엇갈리고 있다. Crafton (1980)은 양의, Shay (1970)와 Greer (1974)의 조사 결과는 중립적이거나 희박한 결과를, 심지어 Kawaja's (1969)의 데이터는 음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Goudzwaard (1968b) 의 연구는 (대출) 거절 비율이 금리 천정과 무관하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금리제한법은 다양한 환경에서 후생을 강화할 수도 있다. 모럴해저드가 신용할당평형을 초래할 때, 시장 청산 체제에서, 자금 공급이 비탄력적이면, 적절한 금리제한은 후생을 증대시킨다. 기업적 이질성이 도입되면, 자금이 완전탄력적으로 공급되지 않을 때라도 명확한 개선이 나온다. 기본적 모럴해저드 모델의 변수들은 은행들이 기업의 수익을 비용으로서만 검증할 수 있을 때 어떤 금리제한이 유용할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신용 시장이 정보비대칭 상황에서는 금리제한은 항상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숨겨진 유형은 Stiglitz, Weiss 모형(1981)이나 Meza, Webb (1987)모델에서도 금리제한으로 인한 수익을 불가능하게 한다. 첫 번째 경우 기업의 수익 분배는 평균 보유 스프레드에 따라 달라진다. 효율적인 금리제한법은 할당을 증가시킬 것이고 대부의 규보는 감소할 것이다. 대출 신청자들의 평균 위험이 감소하게 되지만, 이것은 효용의 증대가 아니다.

둘째의 경우, 기업 수익은 일차 확률지배이론에 따라 랭크될 수 있고, 신용시장은 언제나 클리어된다. 통상의 수요공급분석대로, 금리제한은 할당을 만들어내고 대부를 감소시킨다. 자유방임균형이 과잉대출에 연관되지만, 대부자들은 부정적 현재가치들보다 랜덤하게 제거되기 때문에 금리제한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결과는 저금리를 위해 여전히 악화되고, 대출의 평균적인 질은 낮아지게 된다. 대출 당 평균 수익률은 하락한다. 숨겨진 유형의 공식화는 모두 총후생의 감소를 유발한다.

금리제한법은 결국 선별이 불필요하거나 쉽게 달성될 수 있는 시장에서는 적절할 수 있으나, 숨겨진 액션 – 불량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담보를 제공하거나 특정 절차를 거치게 하는 경우 등 – 은 통제하기 어렵다. 이는 왜 금리제한법이 종종 소비자대출을 향하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저금리는, 자금의 공급이 완전 탄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한, 대출 신청자들의 본질적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금리제한은 자금들을 비현실적 낙관주의로 인해 부정적인 현재가치를 갖는 사업들로부터 방향을 조절시킬 수 있다. 이는 금리제한법에 대한 스미스의 옹호의 기조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국 남해 버블 에피소드와, 그의 동료 존 로의 미시시피 소동을 둘러싼 광란의 본질을 꿰뚫은 것이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심지어는 현재에 와서조차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이다.

 

 

 

  • In Defence of Usury Laws, Giuseppe Coco, David de Meza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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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스는 고대 로마법학과 스토아학파의 자연법론을 계승하여 법의 위계질서를 永久法 lex acterna 自然法 lex naturalis 人定法 lex humana 神聖法 또는 聖經琺 lex divina 의 네 유형으로 분류했다. 영구법은 기타 세 유형의 법들의 바탕을 이루며,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신이 인식하고 계획하고 명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물리적 법칙과 도덕원리들 모두가 이에 포함되는데, 인간은 그 내용을 불완전하게 인식할 뿐이며 불완전하게 인식한 내용조차 불확실할 뿐이다. 모든 종류의 합리적 법이나 원리들은 여기에서 연원한다.

자연법은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며 합리적 행동의 본원적 원리들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자연법은 인간의 실천이성에 내재하는 근본원리들에 직접적으로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의 행위에 관심을 가지는 실천이성의 본질은 인간에게 좋은 것을 꾀하고 나쁜 것은 피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자연법의 내용은 이 '좋음' the good 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이 획득하고자 애쓰는 것이 자연적 선 natural good 이라면 자연법의 제 1원리는 "인간에게 본래 좋은 것은 행해지고 추구되어야 하고 나쁜 것은 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법의 기타 원리들은 바로 이 제 1원리를 구체화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좋은 것 basic human good 과 본질적으로 나쁜 것 harm 을 구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연법의 원리들은 도덕적인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인정법은 입법자가 인간사회의 조직과 통치를 위하여 고안하여 제정한 법이며, 자연법의 원리들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자연법에 의존한다. 신성한 법은 영구법이 기독교의 성경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도덕규범들과 법규범들로서 인간의 생존과 행위의 구체적 내용 제시하는 규범들이다.

 

문제는 자연법과 인정법이 충돌하는 경우 과연 인정법의 효력이 어떠한가라는 것이다. 우선 아퀴나스의 법개념은 다음과 같다.

"법은 한 정치적 공동체의 주권자가 제정하고 공포한, 공공복리를 지향하는 이성의 명령이다. 법은 한 정치적 공동체를 통치하는 주권자 princeps 의 실천이성의 명령이다" - Summa Theologiae.

아퀴나스에 따르면, 통치의 핵심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지배이며 법의 핵심은 법에 기꺼이 복종하는 개인들의 행위조정에 있다. 법은 그 공공성 (공포되어야 함) 명확성, 일반성, 안정성, 실행가능성의 특징을 가지고서 구성원들을 공공적 논의의 참여자들로 대우하며, 이를 통해서 개인들은 서로의 행위들을 조정해 간다.

아퀴나스의 법유형론에서 인정법은 실정법이며, 이 인정법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자연법과 자연권, 즉 보편타당한 도덕원리와 격률들로부터 도출된다. 첫 번째 방식은 '연역적 추론'에 의한 것 deduction 이다. 두 번째는 아퀴나스가 '확정' determination 이라고 명명한 방식이며, 대부분의 많은 법들이 이 방식에 의해서 형성된다.

아퀴나스는 확정의 방식을 건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건물 전체 및 문이나 문 손잡이의 구조와 형식에 관한 추상적 관념은 건물의 구체적인 설계도와 구체적인 문의 형태와 문 손잡이로 특정될 때 비로소 확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도 건축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설계자나 건축가가 결정한 건물의 구체적인 모습은 짓고자 하는 건물에 관한 기본적 관념에서 이끌어지기는 하지만, 어떻게 건물을 짓고 시설들의 겉모양이나 내부구조, 각각의 재료들은 어떤 것들을 선택할 것인지를 확정하는 작업은 건축자와 설계자의 자유이며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즉 짓고자 하는 건물의 기본 관념과 목적의 범위 내에서라면 건축가의 자유는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듯, 실정법의 경우에는 입법자의 입법재량이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번째 방식으로 자연법에서 도출되는 실정법들은 입법자의 재량에 따라서 다양하게 정해지며, 바로 입법자가 제정하였다는 점에서 법으로서의 구속력을 가진다. 즉, 그러한 법들은 이성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제정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실정법의 내용이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존중하여야 하는 실천이성의 원리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 있어야 법적 구속력을 가진다고 본다. 자연법 원리들은 한 가지 특정한 방향으로만 확정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하지만 각각 합리적인 방식으로 입법자에 의해 제정되거나 법원에 의해 판결로 구체화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여러 가지의 합리적 자연법 확정 방식과 내용이 가능하다.

법은 권위적 결정 authoritative decision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같이 살아갈지와 관련하여 구성원 각자가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 것인가를 법이 결정하였을 때 모든 구성원들이 그 법적 결정을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일단 prima facie 해결책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래야만 서로간의 행위조정이 가능해지고, 어떠한 형식이든 사회적 협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상이한 견해들과 이해관계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위의 상호조정과 사회적 협동이 달성되려면 권위적 법적 결정은 필수적이다. 다만 정치적 공동체의 지배자 (주권자) 가 제정한 규범이라고 해서 모두 법으로서의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입법자가 제정한 규범이 법으로 인정되려면 일정 요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다만 주권자가 제정한 규범이라고 모두 법으로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입법자가 제정한 규범이 법으로 인정되려면 다음의 요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1. 이성의 명령일 것
  2. 공공복리를 지향할 것
  3. 통치자에 의해 제정/공포될 것
  4. 정치적 공동체 전체에 책임을 지며 관할권을 가지는 통치자일 것
  5. 어떤 행위를 하게 하거나 하지 못하게 할 것
  6. 강제력을 가질 것
  7. 준수될 것을 의도할 것

   1과 2의 조건을 충족하는 법들이 정의롭기 위한 요건은 (i) 주권자가 제정한 법규범은 공동선의 실현에 봉사하여야 (ratione finis) 하며, (ii) 국가가 제정한 규범의 정당성은 피치자에게 부과되는 부담이 비례적 평등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ratione formae) 판단되고, (iii) 국가의 규범은 주어진 권한의 한도 내에서 입법자가 제정한 것이어야 ratione auctoritatis 한다.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 이성적 양심의 법정 in foro conscientiae 에서도 외부의 법정 in foro externo 에서도 구속력을 갖게 된다.

 

법이 인간으로서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될 종류의 행위들을 요구하고 있다면 개인의 도덕적 의무는 그 법에 불복종하고 저항하는 것이며, 법이 개인에게 그러한 행위를 할 권한을 준다면 그러한 권한 부여는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완전히 무효이다. 이는 제정규범이 자연법의 근본 원리들, 따라서 영구법 lex aeterna 을 침해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의 제정법규범은 '법의 부패 legis corruptio' 이며 법으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

그런데 입법자가 (i) 입법자가 공공복리가 아닌 개인적인 탐욕에서 법을 제정하거나 (ii) 입법자에게 부여된 권한을 넘어서거나 (iii) 공공복리를 고려하기는 하지만 사회구성원의 필수적 부담과 의무를 불공정하게 배분하는 법을 제정한 경우에는 제정법규범이 자연법의 근본 원리들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근본 원리들로부터 도출된 자연법의 이차적 원리들을 위반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실정법들은 부정의하며 이성적 양심의 법정에서 법으로서 구속력을 가지지 않는다.

양심적인 개인들이 부정의한 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도덕적 해이와 무질서 turbatio 가 양산되거나 다른 구성원들이 그것을 말미암아 법을 어기는 다른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때눈, 설령 법이 부정의하여도 공공적 이익이나 개인적 이익에 부당한 해악을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단 법에 복종하여야 할 도덕적 의무가 부여된다. 불복종이 가져올 이익과 해악을 형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통치를 한 정치적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는 데 적절한 전반적 권위 (입법, 사법, 행정의 권능) 를 보유하여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통치 (국가적용)는 법에 의해서 규제되고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치가 폭정이 아니려면 국가의 명령들 중 어떤 것들에는 저항할 권리를 가지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의 통치 principatus liberorum et aequalium 이어야 한다.

이러한 통치는 두 유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獨裁政 regnum: regal government 이며 다른 하나는 제한정부 politeia: political government이다. 전자는 통치자가 제한되지 않고 그 권력이 분리되지 않은 완전한 절대권력 plenitude potestatis을 가지는 정체이다. 본래 regal (regalis) 이라는 용어는 왕 rex 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퀴나스는 '독재정'을 단지 왕에 국한하지 않고 개인이건 집단이건 지명이건 선출이건 종신이건 임기제건 무관하게 절대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통치구조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통치구조는 왕정이나 대통령제, 또는 귀족정이나 민주적으로 산출된 의회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한 통치구조를 독재정 regal 으로 만드는 것은 그 권력의 완전성(제한되지 않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재정이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는가? Legibus solutes 원칙이 적용되었던 고대 로마 황제조차도 자신이 선언한 법의 명령에는 복종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 (또는 최고통치권자)는 신민에게는 복종의 의무를 부과하면서 자신은 그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부담의 공평한 배분' 이라는 원칙을 어겼다는 점에서 부정의를 저지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독재정에서 최고통치자와 신민이 계약을 맺고 상호의무를 부담하고 있다면 그 계약을 위반하고 신민에게 과도한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에도 정당한 권위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된다.

 

아퀴나스는 최고통치자를 규제하고 제한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들에 의해 통치작용이 제한되는 통치구조 limited government 의 유형이 독재정보다 낫다는 견해를 표명하면서, 혼합적 통치구조를 최상의 정체라고 본다. 혼합적 통치구조란 한 사람이 최고통치자이되 나머지 지배자들은 일종의 귀족정과 민주정으로 나뉘는 통치구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권력과 공적 권위를 가지는 자들의 임명, 책임, 권한범위 등을 규율하는 법적 규정들이 반드시 제정되고 운용되는 통치구조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입법부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아퀴나스는 입법권은 자유로운 전체 인민 tota multitude 또는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공적 인물들 persona publica 에 의해서 보유되고 행사된다고 말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계승하여,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만일 자유에 가장 필수적인 권능, 즉 통치자들을 선출하고 통치자들이 잘못했을 때 교정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자유로운 시민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의 공동체라고 할 때 과연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에 속하는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J.Finnis. Aquinas: Moral, Political and Legal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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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스의 법이론에서 법의 지배는 이론상으로는 '실질적 법의 지배'라고 보아도 될 것이나, 당시의 법현실을 고려하면 법을 제정하는 궁극적 권한을 가진 자가 교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사적 사실은 자연법론이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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