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 영국에는 Imperfect Enjoyment라는 제목의 유명한 두 영시가 있었다.한 편은 조지 에서리지 경, 다른 한 편은 로체스터 백작 존 윌모트가 지은 시로, 무려 실패한 성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섹슈얼리티를 전쟁에 비유한 내용이다.

'수행 불안' 이라는 말은 정신분석학 용어인 ejaculation praecox (조루증)' 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는 남자가 생리적 심리적으로 남자다움의 기준에 못 미치는 행위를 했을 때 쓰는 말이었다.

 

두 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긴박감이다. 두 작가 모두 자기가 겪은 성적 상황을 시 자체의 전개와 나란히 흐르게 하려고 애쓴다. 에서리지의 시는 격식과 미적 균형으로 가득한데, "몹시 정념어린 대화를 나눈 후에" 하고 에서리지의 시는 시작한다. 저항의 시도는 곧 묵종으로 바뀌지만, 여인의 팔이 그를 반기는 것처럼 보였던 결정적 삽입 순간 '내 정열이 열정을 압도하는' 바람에 에서리지는 행위에 실패한다.

 

에서리지는 육체적으로 실패했어도 자신을 경배자에, 여인을 성지에 빗대는 비유를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이윽고 남성을 병사에, 여성을 포위당한 마을에 빗대는 적대적 비유를 줄줄이 이어 나간다.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힌 순간, 나는 내가 정복한 성벽 앞에 죽어 넘어졌다"

 

비록 죽어 넘어진 것은 자신이었지만, 에서리지는 자기와 파트너 양측이 생리적으로 사정 행위를 마친 것으로 친다. 그러나 뭔가 미진한 구석이 남는다. 성교는 어떤 면에서 상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했어야 할 행위를 / 우리는 불행이 따로 치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열이 너무 높이 치솟는 바람에 오히려 쾌락의 불길을 꺼뜨렸고, 사랑이 오히려 애욕을 소멸시켰으며, 영혼의 결합이 오히려 육체의 결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남자 쪽에서 하는 말이고, 여자 쪽은 아레티노의 <체위>시에 나오는 밀사와는 달리 성적인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자 쪽이라고 해서 나름대로 자기 잣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미진하게나마 의사표시를 할 기회가 주어지자 여자는 실제로 행위가 너무 빨리 끝났다는 데 놀라움을 드러내는 듯하다.

"끝났음을 깨닫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찌푸렸다 / 유희를 시작한 줄도 미처 몰랐으니"

그러자 시인은 상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데, 여기에는 딴 속셈이 있다. 시인의 말을 들어 보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사랑과 전쟁이라는 이교도적 의식을 치를 힘을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너무 아름다운 것이 그대의 불행"

다른 말로 하자면, 에서리지는 어쩌면 여자에게 육체적으로 침투하는 데는 실패했을지언정 그래도 "승리했다". 기지 넘치는 언어로 육체의 실패를 갚았고, 시적인 언어로 성적인 무능함을 갚은 것이다. 대재앙도, 눈물도 없다. 모든 탓은 여성에게로, 여성의 아름다움과 눈동자의 힘으로 떠넘겨진다. 에서리지의 시는, 여성의 '불가사의'를 침투하여 정복하려 했던 남성적 욕망이 제풀에 고개를 숙이고 성적 패배를 맞는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에서리지는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가져다 짠 언변의 그물로 애인을 얽어매어, 성적 패배를 언어로 벌충할 수 있는 통제력이 곧 자족적인 남성성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손실을 복구한다.

 

에서리지의 시 속 자아상은 점잖은 구애자로, 언어와 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남성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낭패스러운 상황조차 얼마든지 모면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편 그와는 대조적으로, 에서리지보다 어리고 참전 경험이 없는 로체스터는 무능한 병사를 남성의 무력함을 보여 주는 비유로 들어, 성적인 패배로 남성 자아가 입은 부상을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에서리지의 곱상한 '시적' 발단과 달리, 로체스터의 시는 즉각적으고 그 육체적 상황으로 뛰어든다.

 

갈망하는 내 팔에 꼭 안겨 알몸으로 누운 그녀,

나는 사랑으로, 그녀는 마법으로 가득하네.

정열의 불꽃이 우리를 똑같이 달구고,

다정함이 우리를 녹이며, 욕망이 우리를 태우네.

팔과 다리, 입술이 밀착하여 포옹을 갈망하니,

그녀가 나를 가슴에 품고, 그 얼굴로 나를 빨아들이네.

 

에서리지의 정인들은 자기들 역할에 걸맞게, 각자 경배자와 성인, 병사와 포위된 도시라는 은유의 옷가지를 걸쳤지만, 그 사이로는 언급이 생략된 부위가 서로 접촉하기 딱 알맞은 틈새를 남겨 두었다. 반면, 로체스터의 정인들은 확실히 알몸인데, 다시 말해 양측 다 어떤 고정된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옷을 벗어, 남성과 여성 양측에 숨겨진 그 모든 약점들을 드러낸다.

수영복과 성정적인 광고, 의사의 진찰실에 이미 익숙한 현대인의 시점으로는 과거에 나신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해도 남녀 간의 차이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여성의 나신은 불가사의한 힘 같은 것을 품은 한편, 남성의 나신은 음경의 신비감과 실제 크기 사이의 격차가 막대한 까닭에, 남성의 자기 주장을 약화시키고 바보처럼 보이게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체스터는 바로 그 신비로운 음경과 육체적인 음경 사이의 불일치를 주제로 삼는다. 에서리지가 세련된 방식으로 성적 자존심을 되찾는 데 비해, 로체스터는 시나 시적인 감수성 어느 쪽에도 자기 정체성의 근원이라는 작위를 수여하지 않는다. 로체스터에게는 초월적이거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두 육체만이 있을 뿐이다. 로체스터가 생각하는 남성 육체는 훗날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전능한 남성 육체가 아니다. 그리고 로체스터는 남자든 여자든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남자의 감옥이 여자의 감옥보다 훨씬 엄혹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로체스터는 허세스러운 어조로, 여자의 혀가 자기 입에 들어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저 아래의 벼락을 / 때리라고 명한다" 고 서술한다. 제우스 신의 애인이었던 인간 여성 세멜레가 제우스에게 신의 본모습을 보여 달라고 조르자, 제우스는 그 청을 들어주어 세멜레를 수태시키는 동시에 (여기에서 태어난 것이 디오니소스) 산산조각 내 버린다. 남자의 성 능력에 대한 허풍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이야기가 있을까. 그렇지만 로체스터는 하필이면 에서리지의 점잖은 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의 육체적 권능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에 청천벽력 같은 성기능의 상실과 맞닥뜨리고, 그리하여 신과 같은 힘을 가졌던 남근은 급작스레 영 못미더운 살덩어리로 영락한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바삐 그곳으로

내 영혼을 그녀 심장으로 실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는 순간에

나는 축축한 환희로 온통 녹아내렸으니

정액으로 녹아 온갖 틈으로 새 버렸네,

그녀가 닿은 몸 곳곳으로 인해 그리 되었네.

 

여자의 손, 여자의 발, 여자의 외양 자체가 바로 성기다. 새다 spend 라는 말은 19세기 후반까지는 영어에서 사정을 뜻하는 흔한 말이었다. 지금은 그 말 대신에 온다 come 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지금 맥락에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여기 그려진 상황은 도착이 아니라 상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녹이는 벼락" 이라는 과장된 고전적 어투가 오히려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내 안의 제우스가 안에서 폭발해 나를 용해시킨 것이다.

 

에서리지는 대단히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자화자찬을 진통제로 이용했지만, 로체스터는 자기 언어로는 자연적인 패배를 만회하지 못한다. 시와 신화의 전통적 리듬과 명령과 '정념 어린 대화'는 육체적인 것, 정액과 성기를 말하는 직접적 단어들 앞에 야만적 패배를 당하고 만다. 앞서 에서리지의 패배를 살짝 한 발 물러난 후퇴로 친다면 로체스터의 패배는 초토화에 가깝다.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자의 허풍은 파트너의 무심한 장악력을 당해 내지 못한다. 여자의 성적 정체성은 전신에 흩어져 있는 반면 남자의 성적 정체성은 (좌절한) 음경에 집중적으로 투자되어 있다 보니,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려다 도리어 자기 성적 정체성만 잃고 만다. "여자의 손, 여자의 발, 여자의 모습 자체가 성기다" 여자의 다양성은 여전히 평온함과 확고함을 유지하는 반면, 남자의 통일성과 힘은 조각조각 나 버렸다.

 

로체스터의 상대 또한 에서리지의 상대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여자는 우선 '그 찐득한 쾌락들'을 닦아 내고 나서 당신의 '사랑과 희열' 이 그게 다냐고 '우리는 쾌락에도 빚을 갚아야 하지 않나요' 하고 묻는다. 그 쾌락이란 자신의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남성 행위의 주된 목표는 아무래도 성적으로든 시적으로든 여자로부터 감사를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못다한 쾌락'은 때 이른 조루와 마찬가지로, 성교에서 여성도 성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암시하는데, 영어에서 '성교'를 뜻하는 intercourse 라는 말이 상호 간의 성적 쾌락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은 18세기 후반에서나 가서다.

 

만약 이것이 에서리지의 시였다면, 이때쯤 해서 여성에 대한 아리따운 찬양으로 패배를 은근슬쩍 감추고 있으리라. 그대의 지나친 매력이 정인의 애욕을 사랑으로 돌려놓았고, 그럼으로써 정상적인 남성 제어력을 잃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로체스터가 맨 처음 보이는 반응은 축 늘어진 현재에 대한 애수와, 왕성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자랑을 버무려 늘어놓는 것이다. 그 실패를 무마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과 성적인 부분을 떼어 놓는 것뿐이다. 이전에 그는 자기 음경을 웅장하다고 칭찬하고 마치 신인 양 그 위를 선회하면서 나아길 길을 지시했다. 하지만 통제력을 잃은 지금, 음경은 "내 정열을 그르치고, 내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입혔다는 철저한 힐난을 당해야 했다.

 

이로부터 한 세기쯤 지나서 쓰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그녀는 정복하기 위해 조아린다 she stoops to conquer> 의 주인공처럼, 화자는 하층계급 여성들에게 구애할 때는 통제와 자기 억제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가 실지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은 그 어떤 방어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로체스터의 시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에게서 성적인 부분을 떼어 내어 화자로, 적으로 삼아 공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전에는 성적인 무용에 대한 환상 속에서 그것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17세기 이래 줄곧 남성 문학의 기저에 흐르는 환상이다.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 온, 성적이고 음란하여 입 밖에 낼 수 없는 부분이 이제 복수의 기회를 맞아, 내 인성의 기본 갑주로 바뀌어 밝은 낮의 나를 잠식한다는 것이다.

 

남의 눈에 보인다 함은 곧 남에게 평가당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남자는 자기 음경이 꼿꼿하고 준비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면 어떤 여자도 자기 몸에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머리맡에서 제언했듯이, 어쩌면 '문명' 에서 진보의 첫 걸음, 그리고 육체적인 것을 떠나 은유적인 것을 향하는 움직임은, 남 앞에서 음경을 가리는 행위와 더불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부족하게 되면서, 권력자들은 (음경의) 크기에 따라 권력을 나누려고 하거나 누가 누구 앞에서 쪼그라드는지를 관찰해 서열 등급을 나누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잘 부풀려진 예의 바른 살 주머니가 등장한 이래, 로체스터는 그 신체 부위에 다시금 관심을 불러왔다고, 아니면 그 부위의 모든 나약함에 처음으로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로체스터는 여기서 섹슈얼리티로 인해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세당하는 현대 남성상을 예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거세의 핵심적인 부분은 자기 음경을 타자로, '허세꾼'으로, 허세를 부려 비겁함을 감추는 허풍선이 병사로 인식하는 것이다. 로체스터의 시는 발단에서는 남성의 성적인 힘을, 그리고 자기 음경을 "사랑의 화살" 이자 "모든 것을 녹이는 벼락"으로 낭만화하지만 끝에 가서는 "나의 가장 형편없는 부분, 그리하여 가장 증오스러운" 것이라며 공격하고 "1만 개나 되는 더 능력 있는 프릭들이" 연인에게 자기가 주지 못했던 만족을 주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망신스러움과 더불어, 온갖 성병을 모조리 비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전쟁과 전사의 자세가 겉보기에는 아무리 굳건해 보여도, 남성성의 교활함과 불안정함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허세꾼"은 또한 거의 전적으로 군사적인 무용만 가지고 남성성을 규정하는 영웅시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한다. 로체스터는 프로이트의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이미 한참 전에, 군사 공격의 핵심 성적 행태인, '강간과 약탈'의 '강간'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무대에 필수적인 것이며, 남의 모국과 성교를 한다는 것이 내 승리를 확정하는 적절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드러내 놓고 조롱한다.

 

조루라는 경험을 가지고 시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시에서 여성을 찬양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고, 시인은 자기들이 여성들을 더 칭찬하고 싶은데 능력이 모자라 그러지 못한다고 고백하기 일쑤다. 에서리지와 로체스터는 둘 다 남성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다루는 시에서 이 전통을 희롱하며, 둘 다 '사랑' 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의 쾌락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한 발짝을 내디딘다. 에서리지는 넘치는 기지로 이 쾌락에 기여하지만, 로체스터는 여성에 대한 성적 무지로 인한 무능함과 그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무능함을 연결 짓는 데 한층 더 몰두한다.

 

조루를 '발기불능' 으로 부를 때, 거기에는 이미 섹슈얼리티가 곧 통제력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에서리지는 기지와 언어에 대한 통제력으로 남성 육체의 나약함을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남자 구실을 못했을' 때도,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로체스터 시의 언어는 정의하기 어렵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섹슈얼리티의 현장인 남성 육체로부터 솟아난다. 비록 로체스터는 과거의 전형적인 남성의 자기 주장을 조롱하긴 하지만, 그 자신도 거기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 역시 남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남성성 전통들의 복제물이 되는가를 극화하는 까닭이다.

 

더 이전 시대의 시들은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설파할 때, 고통이나 희열, 부상이나 종교적 경험의 이미지에 가까운, 채움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오르가슴을 일종의 죽음으로 보는 후기 르네상스 이미지들은 구체적으로 의식 소멸, 통제력 상실, 찰나적인 공적 정체성 망각을 이야기한다. 16세기 문학은 어떤가 하면, 대부분 사랑은 논하되 남성의 성행위는 논하지 않는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135번 소네트는, 영어에서 음경의 다른 표현인 will 을 이용해 여러 겹 꼬인 말장난을 펼친다.

 

그러니 뜻 충만한 그대, 그대 뜻에 더하시라

내 뜻 하나를, 그대 뜻 더욱 커지도록

다정하지 않은, 아리따운 간청자로 하여금 꺾게 말라

하나만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 한 뜻 안의 나를

 

한 가지의 추동은 성적 호기심을 은유로 사용하여 완전히 낯선 감각 세계에 대한 탐험을 표현하려는 추동이다. 흔한 이미지 하나를 들어 보자면, 신세계를 남성 식민주의자들에게 침투당해 문명을 접하는 여성으로 그리는 것이 그러한 예다. 존 던은 성교에 관한 시 한가운데서 그의 정부를 아래와 같이 일컫는다.

 

오 나의 아메리카여, 나의 새로 찾은 땅이여,

나의 왕국이여, 한 남자가 살아야 가장 안전한 곳.

나의 보석 광산이여, 나의 제국이여.

그대를 발견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또 다른 추동은 공포감이 호기심을 압도할 때 솟아나는 것으로 남성의 힘을 강조하려는 추동이다. 특히 전쟁의 심리학은 실제 전쟁 중이 아닐 때라면 그 덕분에 오히려 성 심리나 연애 심리에 더 부담 없이 갖다붙일 수 있다.

 

남성 오르가슴과 조루는 옛날부터 있었다. 그렇지만 Imperfect Enjoyment 와 같은 시들 이전에는 그것이 자의식적인 문화적 사건이 아니었다. 한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였든, 아직 젠더 차이와 남성의 자기규정, 성적인 '수행' 이라는 개념과 맞물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 유혹을 담은 다른 시들, 현재의 쾌락을 즐기라고 부추기는 17세기 시들에는 나이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소모할 것이므로 그전에 당장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신감에 찬 남성 화자가 나온다. 한편 성교 후의 역겨움을 다룬 시들은 이런 시들의 대척점에 서 있지만, 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남자만의 고유한 소유물이라고 상정한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로체스터의 이 시는, 문화적으로는 성적인 행동 표준에 변화가 일어난 순간, 남성 오르가슴에 통제력의 상실, 성적인 무능함이 따라붙는다는 깨달음의 문턱에 서 있다. 과거의 여성 혐오가 정치적, 신학적, 보수주의자들의 것이었다면, 당시의 다른 남성들은 여성의 성적인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깨어나는 데 분명치는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여했다. 성교를 평가하는 기준은 이제 후손을 낳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여성의 쾌락욕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가 된다. 아레스가 아프로디테와의 잠자리를 위해 갑주를 내려놓았듯 예전에는 전사라는 사회적 역할을 게을리하면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되었지만, 이제는 침투하고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그 원인이 된다.

 

이전에는 성교로 인해 자아가 매몰될지 모른다는 공포감 (작은 죽음) 이 있었다면, 그로부터 한 세기쯤 지난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대에는 그 공허가 초월로 바뀌고, 시인들은 그 초월을 향한 열망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로체스터의 시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남성 섹슈얼리티가 음경에 놓인 것이 역사적인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리고 나아가 그 과정이, 여성 섹슈얼리티를 남성 섹슈얼리티와 구분되는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으레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인간 본성의 수많은 양상들은 실상 이전에는 지배적이었던 관점들이 당대의 조건과 어긋나는 역사적 변화를 거쳐 왔는데, 남성성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역사에서 로체스터의 시는, 이전에는 적어도 어느 한 계급의 소유이거나 '타고난' 전형으로 간주되던 남성성이, 군사적 승리와 성적인 정복을 뽐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공허한 행위로 변해 버리는 위기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로체스터 식 남성은 낡은 남성적 방식에 기댔다가 힘과 통제력을 잃었으니 그 결과 응당 여성과 새로이 연대를 맺어야 할 것 같지만, 로체스터는 그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모든 남성의 여성과의 성교는 시련이고, 거기서 남자는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매시지를 내포하는데, 그 이유는 여자들에게 사실 남자는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공포가 남자 안에 너무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로체스터는 [시뇨르 딜도] 라는 한층 조롱조의 시에서 궁정 숙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죽 코트' 를 입은 '고귀한 이탈리아인' 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다. 로체스터는 음경의 대체물로 이름 높은 시뇨르 딜도가 남자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며, 여자가 남자한테서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그것뿐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우리 고상하신 마나님들의 특기는

어릿광대들의 프릭에 홀랑 넘어가기

딜도 씨의 분별과 정력을 마님들이 아시는 날엔

맵시꾼들은 홀딱 망할걸

 

시뇨르 딜도는 마침내 분노한 '프릭 떼' 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지만 프릭들은 고환이 달려 있어서 몸이 둔하기 때문에 딜도를 마을 밖까지 쫓아가지는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훈은 명확하다. 여성들더러 택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시뇨르 딜도를 택하리라는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에 아내의 정숙을 시험한 많은 남자들의 이야기 (초서의 [법률가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 돈키호테의 한 장인 [분별없는 호기심] 등) 와 마찬가지로, '시뇨르 딜도'는 여자들이 남자들의 성적 봉사를 불만스러워 하거나 필요 없어할지도 모른다는 남성의 공포를 다룬다. 차이가 있다면 '시뇨르 딜도'는 다른 남자의 성적 유혹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남성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리라는 예언을 외쳤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적인 힘과 공적인 힘이 곧 성 능력과 등가로 여겨지는, 젠더 전쟁에 대한 자라나는 인식은 그저 로체스터라는 한 17세기 영국 시인이 처음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그 공식을 가장 뚜렷하게 제시했을 뿐이다. '즐거운 군주the Merry Monarch' 로 알려진 찰스 2세의 전반적인 통치 스타일과 궁정의 낭비벽, 그리고 그의 수많은 정부들은 실제 권력과 성행위 사이의 직접적 관계, 그리고 더러는 서로의 치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예다.

 

영국 내란 기간에 나돈 수많은 선전 책자들을 보면 그런 주제들이 전쟁 때문에 한층 정치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선전 책자들은, 프랑스로 도피한 왕정주의자들은 긴 머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나약한 자들이며, 그들이 바다 건너에 있는 동안 그 아내들은 분명히 힘 좋고 정치관도 똑바로 박힌 의회당원들로부터 적절한 성적 봉사를 받을 거라고 장담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17세기 내내, 오쟁이 진 남편, 곧 남자 망신을 시켰다는 이유로 주인공에게 혼나고 청중에게는 조롱당하는 어리석은 정인이나 남편이 희극의 주요 재료가 되었다. 1670년대에는 윌리엄 위철리가 희곡인 [시골 아낙네]에서 그 농담을 역이용하는데, 주인공은 발기불능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남편들을 방심하게 만들어 수두룩한 지체 높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

 

각각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의 탄원' 과 '남성의 응답' 이라는 제목이 붙은 선전 책자 두 권을 보면, 역시 1670년대에 일어난, 한층 흥미로운 성과 정치학의 연쇄 사건이 보인다. 카페들은 찻집과 초콜릿 집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현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딱 알맞게 무르익어 있었다. '… 여성의 탄원' 은 근본적으로 카페들이 "전 기독교인 가운데 가장 능력 있는 행위자로 인정할 만한" 영국 남자들의 성적인 잠재력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했다. 커피가 남자들의 액즙을 고갈시키는 바람에 남자들은 '세우지도 못하고, 단 1회 출격에 넙죽 업드러진다… 소집을 당했는데 탄약이 없는 젊은 민병대처럼, 그들은 행위를 할 수 없으며' 화력도 없어 '불꽃만 튀기고 꺼진다' 한편 '남성 능력에 대한 오명을 벗기는 것'을 목표로 발표된 '남성의 응답' 에서는 커피란 원래 터키산이며 '터키 사람들이야말로 그 방면으로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고 정열적이라고 자처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 라고 주장한다. 커피는 남성의 정수를 고갈시키기는커녕

 

발기를 더욱 왕성하게, 사정을 더욱 충만하게 만들며, 정자에 영적인 정수를 더해주어 단단하게 만들고 자궁의 입맛에도 더 잘 맞게 하며 여성인 정인의 분투와 기대에도 값하게 만든다

 

찰스 2세는 오랫동안 카페의 확산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 까닭은 카페가 선동, 또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야당의 거점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탄원' 은 그런 두려움을 아예 무시했다. 카페의 남성들은 말하자면 여성처럼, "너무 온순하고 너무 말만 많아졌기" 때문에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찰스 2세는 1675년에 가서 마침내 카페 탄압에 나서긴 했지만 반발이 극에 달하는 바람에 11일 만에 포고령을 백지화했다. 발기불능과 유약함에 대한 비난은 문화적 정치적 분위기의 일부여서 어느 측에서든 입맛대로 가져다 쓸 수 있었다. 그 후 17세기 후반 내내 각 정당들은 상대를 논박하기 위해 툭하면 이 화두를 이용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남성 발기불능과 부적절한 성적 수행을 묻는 이 모든 논의들이 새로운 압박을 가해 왔다 하더라도, 우리는 로체스터의 정인이 던진 물음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는 쾌락에도 빚을 갚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말로 하자면, 이성 관의 관계는 군사적 모형을 바탕으로 한 전투인가, 아니면 쾌락과 즐거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모인가, 그도 아니면 프랑스인들이 향유 jouissance 라고 부르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선 성애인가? 자유사상가의 성 철학 뒤에는 자연적인 것에 대한 몰두가 존재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우주의 중심에서 남자를 밀어내고 여성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과의 연대를 강조한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아담이 한 말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천사 라파엘이 아담에게 이브에 대한 육체적 사랑은 단순히 접촉으로 인한 즐거움일 뿐이라고, 그것이 가축에도 짐승에게도 허용되었음을 생각하라" 고 말하면서 기를 꺾으려 하자 아담은 이브에 대한 육체적 느낌은 감정적 영적 "조화"와 엮였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히려 "하늘의 영은 사랑하지 않는지,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라고 물어 라파엘은 난처하게 한다. 라파엘은 얼굴을 붉히며 자기들은 "공기와 공기보다 쉽게… 순수와 순수의 욕망은 결합하여" 완전히 섞여 있기 때문에 접촉은 천사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라파엘은 서둘러 작별 인사를 고한다. 인간들과 천사들 간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천사들은 한 장으로 된 천상의 직물에서 잘려 나온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두 육체로부터 나온 영혼을 하나로 합치려면, 살과 뼈로 서로 격리된 두 분극에 쾌락과 사랑의 조화로 다리를 놓아야 한다.

 

                              -  Leo Braudy "Performance Anxiety"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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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거의 절반 이상의 인구가, 여성의 출산율이 자연 인구 유지를 위한 최소 수치인 2.1을 밑도는 국가에 살고 있다. 이는 멜버른과 모스크바, 상파울로 그리고 서울, 테헤란, 도쿄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는 서구나 부유한 국가들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아르메니아, 부탄, 엘살바도르, 폴란드, 카타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57년에 4에 가까운 절정을 이루었던 미국의 출산율은 이제 2를 간신히 넘는 정도인데 다른 부유한 국가인 독일이나 일본 등과 비교하면 단연 높은 수준이다. 인건비가 저렴한 브라질, 러시아, 이란 및 남 인도와 같은 개도국들에서도 출산율은 1980년 이후로 꾸준히 하락하는 추세다. 중국의 노동인구는 지난 35년간의 경제적 기적 이후로 2012년 피크를 찍고 감소하고 있으며, 통치지도자들에게 중국이 부유해지기 전에 늙어버릴 것이라는 공포를 안겨주고 있다.

 

매우 높은 출산율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으나 사하라 이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니제르, 말리, 소말리아, 우간다 그리고 부르키나파소 등 5개국이 6이상의 출산율을 기록했다. 5 이상의 국가는 18개국에 이른다. 이라크 요르단 필리핀 과테말라 등의 예외를 제외하면 사하라 이남 지대가 출산율이 3~4에 이르는 국가들을 이룬다. 파키스탄, 이집트, 아이티, 온두라스 및 볼리비아의 출산율은 3을 약간 밑돈다.

 

이것은 서구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그리고 경고의 알람으로 때로는 히스테리 증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식으로 다가왔다. Jonathan V. Last, 는 그의 책 "What to Expect When No One's Expecting,"에서 '다가올 인구 재앙'을 '미국의 baby bust'로 표현했다. 국립 국방대학교의 Steven Philip Kramer 교수는 '출산 갭'을 줄이고 적은 노동자가 많은 은퇴자를 부양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출산 촉진' 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지한 이코노미스트지마저도 '사라져가는 일본인' 에 대한 경고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어두운 예언은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며,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고 결국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았다. 시어도어 루스젤트는 1934년 "Twilight of Parenthood" 와 같은 책에서 대공황시기에 앵글로색슨들이 "인종적 자살"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이는 서구 세계의 상상을 사로잡았다.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서구의 베이비 붐 추세 이후로 재앙의 합창은 다시 부활했는데, Paul R Ehrlich 의 1968년 책 "The Population Bomb" 에서는 식량의 생산을 압도하는 인구 증가가 전지구적인 재난적 맬더스트랩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들이 팔려나갔다. 이런 공포의 행진은 지치지도 않아서, "The Birth Dearth" (1987) 이나 "The Empty Cradle" (2004) 같은 제목의 책들은 꾸준히 반복해서 서점에 나타나곤 했다.

 

왜 시람들은 이런 전세계적 트렌드를 집단 자살과 같은 표현을 써 가면서 재앙으로 다루는 것일까? 이는 인구 감소가 국가적, 군사적, 경제적 파워의 저하를 발기부전처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Margaret Artwood 의 1985년 디스토피아 고전 The Handmaid's Tale 이나, P. D. James 의 소설에 기반한 멕시코 감독 Alfonso Cuaron 의 2006년 영화 "Children of Men" 등에서 이런 근심들이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 느려진 인구 증가는 인류의 번성에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기후 변화와 끝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 핵 위험의 시대에, 인구의 규모가 곧 힘이라는 역사 속의 공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출산율의 저하는 부의 성장이나 세속주의의 기능이 아니며, 이는 전세계적인 것이다.




 

총 출산율이 2.1 이하로 떨어졌을 때조차도 과거 인구 증가의 '모멘텀'은 그대로 남아 인구를 수십년 간 증가시켰다. 인구 총수가 감소하는 시기가 닥치더라도 이 추세는 곧 사라져 전체 추세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는 급격한 출산율 감소를 경험했고 이는 높은 성인 남성 사망률과 맞물려 (이는 음주 성향과 깊은 관계가 있다) 널리 알려진, 러시아 인구의 지속적 감소를 가져왔다. 출산율은 이후 1.6 수준으로 반등했고, 음주 관련 규제의 도입으로 노동인구 감소율도 둔화되었다.

 

절망적으로 가난하지는 않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임기 여성들은 연적으로 아이를 갖는 부담과 대가를 비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젊은 여성은 특히, 물론 젊은 남성들마저도, 높은 이혼율과 더욱 오래 사는 고령의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결혼과 육아를 중요한 리스크로 보고 있다. 이 리스크를 준비하고 부담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출산을 하게 되는 20~35세 사이의 청년들에게 가장 큰 짐이다. 브라질, 이탈리아, 터키 그리고 미국에서 청년들은 더 높은 교육과 그로 인한 더 많은 교육 채무를 요구하는 커리어를 준비해야 한다. 대학 수준의 학위를 지니더라도 고용은 불확실하고 커리어패스는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다.

 

동시에, 맞벌이는 갈수록 핵심이 되어 가고 있다. 부유한 국가와 빈곤한 국가를 가릴 것 없이 소득은 위태로워지고 있다. 높은 주택 가격과 임대료, 모기지론의 높은 장벽은 갈수록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 낼 동력을 제한하고 있다.

 

빠르게 감소하는 출산율은 끊임없는 근심걱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첫째, 전술한 대로 출산율의 감소는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여성들에게 기회를 준다. 결혼의 연기와 출산을 2명 이하로 줄이는 추세는 개발도상국에서도 일반적이며, 이는 젊은 여성의 교육 수준 증가와 커리어의 개선과 연관되어 있다. 출산 저하를 걱정하는 것이 거의 남자들뿐이라는 점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둘째로 중간 수준의 노동력은 저출산사회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이 1970년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이 인도를 압도한 원인 중 하나이다. 남인도 특히 Kerala 주에서도 상당한 출산율 감소는 두드러지는 경제와 교육 성과로 되돌아왔다. 당연히, 어린아이들은 서비스업과 농업 및 산업에서의 육체노동 모두에서 숙련된 청장년노동자만큼의 생산성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초교육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 줄어들수록 고급 교육에 더 자원이 집중될 수 있다. 비록 중국의 경기 성장이 초기에는 농촌 지역의 수많은 저임금 이민자 유입에 힘입은 적도 있지만, 이 나라는 인력의 양이 아니라 곧 고급 교육을 받은 고급인력의 질이 떠받치는 경제체제로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셋째, 젊은이들의 고용과 커리어 경험을 강화함으로써 저출산은 사회적 정치적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고출산율 사회는 생산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을 양산하게 마련이고, 전문가들은 이들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의 봄과 테러리즘에 기여하는 'youthquake' 현상을 일으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출산율이 감소하기 시작한 이후 20~30년 후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청년들은 더 이상 노동시장의 과잉공급이 아니게 된다. 고용주들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 가치가 높아짐으로써 이에 따라 경제적 직업적 전망도 개선되고, 그로 인해 결혼과 가정 형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는 한 세기 이상 세계 최대 경제 체제인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젊은 노동자들은 심각한 고용과 커리어 문제에 직면해 있고 이는 나이든 노동자들이 그들의 직업을 틀어쥐고 있는 현상에서 일부 기인한다. 지난 10년 간 노동참여율은 고령층에서 더욱 높아졌고, 이는 고령노동자들의 건강과 생산성 향상,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의 감소와 서비스업의 증가, 그리고 파괴적인 금융위기가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계획에 미친 충격 등과 관계가 있다. 아무도 지난 6년간의 추세로부터 미래를 전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낮은 출산율은 해당 국가의 정부들이 자국의 청년들을 외국으로 내보내 직업을 찾게 하고 돈만 송금하게 하고 자국내에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위험을 줄이는 따위의 인구 유출 정책을 쓰게 할 유인을 낮춘다.

 

이러한 정책들은 때로는 명백하고 때로는 암시적으로 실제적 양가감정과 결함한 상태로 멕시코, 필리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그리고 인디아에서, 사하라 이남 지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해외 이민이 필수적인 삶의 길이 되는 방식은 한계가 분명하다.

 

다른 수많은 사회적 변동이 그러하듯 저출산의 확대는 수많은 도전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겨준다. 이에 적응하지 못한 정치 체제는 골치아픈 재정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후한 공공연금제도를 갖춘 유럽은 청년 취직자들의 감소와 기대여명의 증가로 인해 큰 불안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시스템 유지를 위해 빠른 정년과 높은 '연금 지불 비율'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저출산 추세는 조정될 수 있고, 역전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스웨덴과 프랑스 같은 일부 국가들이 이미 경험했던 추세이다. 전후 스웨덴은 1970년대와 1990년대에 1.6 수준의 낮은 출산율을 기록했지만, 이는 아마도 다양한 육아지원시스템 덕분에, 1.9 수준으로 반등했다. 프랑스는 아이를 가진 젊은 가족에 장기적인 공공 지원책을 마련했고 출산율은 스웨덴 수준으로 낮아지지 않았다. 다른 국가들은 맞벌이 부모를 지원하기 위해 반나절을 교육하고 일찍 마치는 전통적인 학교 일정 제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이러한 경험들은 일각이 주장하듯 저출산 문제가 멸망으로 치닫는 '죽음의 나선' 과 같이 호들갑을 떨 공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세계 경제는 여전히 취약하고, 노령 사회라는 불길한 전망이 여전히 안전한 추정이긴 하지만, 인구 감소는 어찌되었건 반복되는 하나의 유행이기도 하다. 수많은 다른 유행처럼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인본주의는 대처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많다. 저출산은 그 중의 하나가 아니다.

   

 

By MICHAEL S. TEITELBAUM and JAY M. WINTERAPRIL 4, 2014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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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명백히 위기를 맞고 있다. 아랍의 봄과 오렌지 혁명으로 비추었던 독재 정부 틈새의 민주주의의 서광은 또 다른 전제적 정부와 독재 정부의 집권으로 그 빛을 잃었다. 나치즘과 아파르트헤이트와 빈곤의 위기에도 민주주의는 그리스, 스페인,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소비에트 연방에서 수많은 독재 정부를 물리치고 전 세계 인구의 40% 이상에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제도를 전파했지만, 21세기에 들어 그 자유도는 꾸준히 하락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러시아는 전 KGB 국장 출신의 '포스트모던 짜르' 푸틴이 정적들을 압살하며 집권중이고, 베네주엘라와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등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라크에서의 두 번의 전쟁 이후의 중동 지역에 대한 민주주의 이식은 미국의 제국주의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이집트에서 무바라크의 하야는 무슬림 형제단의 또 다른 전제 정부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4년부터 일당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터키의 이슬람적 민주주의 실험은 부패와 독재로 타락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도 경제 성장이 민주주의 체제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상징적이고 강력한 위협이다. 집권 단일당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는 금융과 경제 체제는 금융 위기를 잘 피해나갔고 30년마다 삶의 수준을 두 배씩 향상시켜나간 결과 중국의 독재 정부는, 85%의 국민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상징 미국의 정부 지지율은 31%에 머무르고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양당의 양극화와 게리맨더링, 로비스트에 의한 금권 선거와 이권 집단의 영향력 강화로 비틀거리고 있고, EU조차도 일부 국가들의 테크노크라트들이 회원국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체제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세계화 또한 시민국가의 의사와 참여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국제 무역과 세계 금융의 성장으로 IMF나 WTO 등 국제 기구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고, 국가 기반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기후 변화나 역외 탈세 등 국제 문제를 다루는 데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기반의 선진국 국민들도 정치 체제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1950년에는 20%의 영국 국민이 정당원이었으나 현재는 1%에 불과하고, 절반 이상의 EU 시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플라톤의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옳았던가? 토크빌이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는 언제나 실제보다 약해 보이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항상 혼란스럽고, 무책임하며, 나약한 듯 하지만 민주주의는 결국 전제정부보다 더 나은 대안들을 더 창의적인 답안들을 찾아내곤 했다. 제임스 메디슨과 존 스튜어트 밀이 단호하게 주장한 바 대로, 민주주의는 강하고 불완전한 메커니즘이다. 신중하게 설계되어야 하고 인간의 창조성을 연결하며 탐욕을 잘 견제해야 한다. 현재 수많은 민주주의 실험들이 실패한 원인은 '선거' 에 대한 과도한 열정에 기인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21세기에 가장 성공한 체제로 자리잡은 민주주의의 정체는 국가 권력의 견제와 표현 및 집회의 자유와 같은 개인의 권리, 다수결주의에 대한 경계와 강력한 분권으로 인한 권력 집중의 예방에 있다. 이 시스템은 끊임없는 학습과, 설득과, 반 자유와의 투쟁과 그리고 균형으로 유지되고 또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http://www.economist.com/news/essays/21596796-democracy-was-most-successful-political-idea-20th-century-why-has-it-run-trouble-and-what-can-be-do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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