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제국주의론은 주로 평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이며 공산주의 선전의 상투 수단이 되어 왔다. 이는 미국 상원을 대신해 1934~1936년 재정적 산업적 이해관계가 미국의 제 1차 세계대전 개입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조사한 나이 위원회 Nye Committee 의 공식 철학이기도 하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가 매우 많은 관심을 끌었기에 악마 제국주의론은 한동안 미국에서 외교 문제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설명이었다. 이 이론이 단순하다는 사실도 그 인기에 기여했다. 전쟁 물자 생산자 (군수품 제조업자) 국제적 금융가(월가) 등과 같이 전쟁에서 명백히 이득을 보는 몇몇 그룹을 동일한 종류로 묶고 있다. 이리하여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충동질하고 계획하는 '전쟁상인' 즉 '악마' 가 되는 것이다

극단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주의를 제국주의와 동일시하고, 온건파 마르크스주의자와 홉슨의 후계자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운영상 잘못이라고 보는 데 반해, 악마 이론에 집착하는 사람은 제국주의와 전쟁을 모두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한 사악한 자본주의자의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고 파악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몇몇 전쟁이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주로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일어났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1899~1902년의 보어 전쟁과 1932~1935년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 일어났던 차코 전쟁 등이 고전적 사례다. 금광에 대한 영국의 이해관계가 보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혹자는 차코 전쟁을 유전 지배권을 놓고 두 석유 회사가 벌인 전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숙한 시기에 이른 뒤에는 보어 전쟁을 예외로 한다면 전적으로 혹은 주로 경제적 목적 때문에 강대국이 전쟁을 벌인 적은 없었다. 예를 들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의 경우 중요한 경제적 동기가 없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독일 연방 내부에서 프로이센에 유리하도록, 나중에는 유럽 국가 체제 내에서 독일에 유리하도록 권력 분포를 새로이 확립하려는 목적에서 발발한 전쟁이었으며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1854~56년의 크림 전쟁, 1898년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 1904~5년 러일 전쟁, 1911~12년의 이탈리아-터키 전쟁 그리고 몇몇 발칸 반도에서의 전쟁을 살펴보면 경제적 목적은 있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양차 세계대전은 분명 정치 전쟁이었으며, 전 세계의 제패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럽의 제패를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 이익과 손실은 승리와 패배라는 정치적인 결과에 따르는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경제이론적 제국주의론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와 꽤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기간 동안, 즉 자본주의 시대에도 경험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경제이론적으로 제국주의와 동일시되곤 했던 식민지 팽창기는 자본주의가 성숙되기 이전이었으며, 따라서 붕괴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또한 16세기에서 18세기의 시기와 비교할 때 19세기와 20세기의 식민지 획득은 양적으로 훨씬 적다.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를 맞아 자본주의는 오히려 제국의 대규모 해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물러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 단계 이전에 이미 제국이 건설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경제이론적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할 역사적 증거는 부족하다.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정책은 정치적 의미에서 제국주의였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이나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책들 역시 제국주의였다. 7세기와 8세기 아라비아의 팽창은 제국주의의 전형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제 1차 십자군의 결성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는데 그것은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 즐겨 사용하던 전형적인 논거였다.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으로 막혀 있으니 많은 인구에 비해 너무나 협소하다. 주위에 부가 넘치는 것도 아니고 농민이 살기에도 벅찬 양식만이 나올 뿐이니… 따라서 그대들은 서로 죽이고 멸망시키며 전쟁을 일으킬 것이요, 바로 그대들 중 많은 이가 상호간의 싸움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루이 14세, 표트르 대제, 그리고 나폴레옹 등은 모두 근대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위대한 제국주의자였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모든 이런 제국주의 현상은 자본주의 시대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미 확립된 권력관계를 전복하고 그 대신 제국주의 세력의 우월한 지배를 확립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이 두 시기의 제국주의는 경제적 목적을 정치적 고려에 부차적으로 종속시키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폴레옹은 개인적 이득을 얻기 위해, 혹은 경제체제의 조절 불량을 피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시작했던 것이 아니다. 이는 히틀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산업계의 총수가 기업에 기업을 추가하고 확장해 마침내 자기가 그 산업 전체를 독점적으로 혹은 준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될 때까지 산업'제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똑같은 목표였다. 자본주의 이전 단계의 제국주의자, 자본주의 시대의 제국주의자 그리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자가 원했던 것은 권력이었지 경제적 이득이 아니었다.

악마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자는 제국주의 정책을 부추기는 수단의 하나로 정부를 이용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경제적 해석을 뒷받침한다고 인용된 역사적 사례를 자세히 조사해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관계가 성립한다. 제국주의 정책은 보통 이들 정책을 지지해주도록 자본가를 소집한 정부가 제창한다. 슘페터 교수의 말을 빌려보자면 "자본가가 국제정치를 지배한다는 얘기는 신문에나 실리는, 사실과는 어이없게 딴판인 동화 같은 얘기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자본가는 전쟁을 부추기기는커녕 제국주의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예도 드물었다. 전통적으로 제국주의와 같이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정책에 상인과 제조업자는 극력 반대해왔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제이콥 바이너 Jacob Viner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평화주의, 국제주의, 국제적 화해 그리고 분쟁의 타협, 군비 축소를 지지했던 사람은 대부분 중산계층이었다. 팽창주의자요 제국주의자이며 주전론자였던 사람은 대부분이 귀족과 농민 그리고 더러는 도시의 근로자 계층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 보어 전쟁 기간에, 또 히틀러의 등장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영국 의회에서 유화정책을 내세웠던 사람은 모두가 부유한 계층, 한창 세력이 커가던 북부 공업지대의 중산계층과 런던의 '도시'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자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미국 혁명, 1812년의 전쟁, 1898년의 제국주의, 진주만 기습 사건 이전 루스벨트 행정부 시절의 반나치 정책 등을 반대하던 주류 세력은 주로 상공업계였다. 1876년 9월 26일 솔즈베리에게 보낸 디즈데일리의 글에서는 "모든 나라의 돈 많은 상인 계층은 전쟁을 반대하고 있다" 라고 쓰고 있다. 독일 주재 영국 대사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하루 전인 1914년 6월 30일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는 "상공인 계급이 어떤 형태든 전쟁은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모두에게서 듣고 있다" 는 내용이 있다.

   

18세기 초 <스펙테이터 Spectator> 지의 앤드루 프리포트 Andrew Freeport 에서부터 노먼 에인절 Norman Angell의 저서 <위대한 환상 Great Illusion> 에 이르기까지 '전쟁으로 이익 볼 것은 없다. 산업사회와 전쟁은 상호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보다 평화가 필요하다' 는 것은 계급으로서의 자본가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자본가 대부분의 확신이었다. 자본가의 행동에 바탕이 되는 합리적 계산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로지 평화뿐이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자본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비합리적 요소와 혼란이 따른다. 제국주의는 기존 권력관계를 전복하려는 노력인 까닭에 불가피하게 전쟁이라는 위험을 수반한다.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일반적인 번영과 평화를 기대했다. 자본주의 비판자는 번영과 평화가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과 폐지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양쪽 진영 모두가 정치 문제를 경제적 처방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벤담은 전쟁을 유발하는 제국주의적 분쟁을 없애는 방법으로 식민지 해방을 주장했다. 프루동과 코브던은 관세를 국제 분쟁의 유일한 원인으로 보고 자유무역의 확대에 평화가 있을 것으로 파악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기업인의 행위를 결정한다고 생각되던 경제적 요인이 모든 사람의 행동을 이끈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해석이 쉽게 받아들여진 또 다른 이유는 이 이론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데 있다. 슘페터가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던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일련의 핵심적 사실이 이미 완벽하게 설명된 듯하다. 국제정치의 모든 미궁이 단 한 번의 권위 있는 분석으로 깨끗이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즉 제국주의와 같은 그토록 위협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전인했던 역사적 세력의 비밀, 그것을 국제정치의 특수한 형태로 규정하는 이론적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특정 상황에서 구별해내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실제적 어려움과 같은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고유한 경향, 혹은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라고 단순화되었던 것이다.

   


                   - Hans. J. Morgenthau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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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중국 군사재판부는 중국인들을 생매장한 혐의로 기소된 일본군 요네무리 하루키와 고문, 강간, 약탈의 혐의로 기소된 시모토 지로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6개월 뒤 이들은 상하이 남경로에 내몰려 끌려다니다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 이것이 일본 전범에 대한 첫 공식 처형이었다. 상하이 주재 영국 총영사 A.G.N.오그든은 난징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 공개 처형이 잔혹하고 후진적이라고 지적하며 상하이의 외국신문들이 "중국 당국이 아직도 그런 (공개처형) 절차를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고 비난한 사실도 보고했다. 또 중국이 적들을 다루는 과정이 '이중잣대' 적이라고도 비판하였다. "중국 당국이 일본인 전범들과 중국인 '변절자들' 을 대하는 무자비한 태도와, 이곳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독일인들을 대하는 느긋한 모습을 비교하면 아주 재미있다. 독일인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함께 갈 수 없는 처지이지만 전후 협상에서 그들의 존재가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해 추방하지 않은 것이다"


오그든의 보고서는 런던으로 보내졌다. 외무부 전쟁범죄국의 프레더릭 가너가 이를 두고 중국의 행동을 비판하는 오그든의 태도에 이종차별적인 저의가 있음을 간파한 듯 날카롭게 반박했다.

"사실 중국은 일본 전범들에게 아주 온건한 편이었다. 그들이 저지를 엄청난 범죄에 비하면 처형자의 수는 지극히 적다. 중국은 많은 사람을 몰래 처형하기보다, 몇몇 극악한 범죄자를 대중 앞에서 단죄함으로써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것이 유럽의 많은 나라보다 더 혐오스러운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그들이 더 훌륭하게 처신했다고 본다. UN 전쟁범죄위원회의 태평양 소위원회는 이미 3월에 활동을 종료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그 모체를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중국이 이용가치가 있는 독일인들을 자신의 나라에 머물게 하는 것을 비난한다면, 미국에 있는 독일의 로켓 과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그 사이 연합국은 도쿄에서 일본 전범 중 정치와 군사 쪽 고위 관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큰 전후재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중잣대의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1946년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 그리고 비인도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소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Far East 가 설치되었다. 법정의 설치강령, 임명권, 기소권은 모두 미국의 손에 있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점령군 사령부가 관장했다. 판사석은 연합국측 11개국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소련, 중국, 인도, 네덜란드, 필리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이 선임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법관 윌리엄 웹 경이 재판장을 맡았고 소추위원회는 미국인 변호사 조지프 키넌이 이끌었다. 도쿄 법정도 뉘른베르크처럼 죄인들을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법과 평화를 앙양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 교훈을 남기고, 일본인들의 눈앞에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맥아더는 특히 일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공개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도쿄 지역 신문 발행인들에게 "전면을 할애해서라도 재판을 심층취재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이 대개 타블로이드 판 한 장 분량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판사들은 거대한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청객들이 "얼핏 보기에도 너무 높아 보였다" 고 할 정도였다. 모두가 정치적 배려에 따라 그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었는데, 캐나다 판사는 워싱턴과 오타와 간에 다른 전범재판을 놓고 이루어진 거래의 덕을 입었다. 인도 판사는 영국측에서 프랑스나 네덜란드보다 인도가 더 고통을 받았다고 고집한 바람에 결정된 경우였다. 영국이 인도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건네준 선물이었던 셈이다. 필리핀 판사는 자기네 나라도 인도만큼이나 고통받았다고 주장해 자리를 챙겼다.

피고측 변호인단(28명의 일본인 변호사와 2명의 미국인 변호사)은 곧 판사들의 신뢰성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미국인 변호사 조지 퍼네스는 "이 판사들은 일본을 패망시키고 재판에 회부한 당사국들의 대표이므로 피고들에게 적법하고 공정한 재판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고 주장했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과학자들이 화성에 갈 수 있는 우주선을 완성하고, 그곳에서 중립적인 나라와 국민들을 찾아내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재판을 치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라고 받아쳤다.

변호인단은 몇몇 판사들이 도저히 재판을 관장할 수 없는 부적합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고삐를 조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인 윌리엄 웹은 1943~44년 일본군이 호주군에 저지른 잔학행위를 조사한 적이 있었으며, 소련의 I.M.차라야노프 소장은 법정의 공식 통용어인 일본어와 영어를 하지 못했고, 필리핀의 델핀 자라닐라는 일본군에 붙들려 전쟁포로로 수감된 적이 있었던 전력이 피고들에게 적대적일 것이라는 점을 문제삼은 것이다.

소추위원회는 1928년의 사건까지 거슬러올라가 조사한 55개의 '반평화 범죄' 중 36개 죄목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입증했다. 도쿄 재판의 경우 체포된 전범 용의가 9168명 가운데 A급 전범 46명은 동경에서, B급과 C급 용의자 6676명은 피해 당사국에서 재판을 치렀고, 2846명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조지프 키넌은 기소 요지 낭독에서 '문명에 도전한 전쟁' 에 다름 아니었던 일본의 야만적 행태를 비난했다.

"그들은 기소장에 수없이 열거된 것처럼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침략전쟁을 모의하고, 준비하고, 개시했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인간을 하찮은 소모품처럼 다루었습니다. 이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억압하고 노예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소추위원회가 침략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뉘르베르크 재판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연합국은 '반평화 범죄'라는 것이 국제법상의 근거가 미약하고 법조계에서도 이를 입증하는 데 회의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런던에서 외무부 법률보좌관 에릭 베켓은 도쿄 재판에서 '반평화 범죄' 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쿄 재판에서 이 논점에 대한 방어 논리를 깨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이 어쨌든 어느 정도 악법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말은 연합국이 곧 '법이 없으면 처벌도 없다 nulla poena sine lege' 전제를 위반했다는 의미였다.

소추위원회는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일본이 지난 18년간 펼쳐온 외교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피고들을 다그쳐 전시정책의 범죄성을 억지로 인정하게 하려 한 것은 서투른 처사였다. 도조 히데키 전 수상은 침략을 꾸짖는 키넌의 분노에 찬 추궁을 쉽게 받아넘겼다.

키넌: 도조 씨,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범죄라는 데 동의합니까? 간단히 질문하죠. 전쟁은 반인간적 범죄라는 데 동의합니까?

도조: 전쟁이 범죄라는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승자든 패자든 인간에게 불행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면 동의하겠습니다.


그동안 변호인단은 일본의 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확산 야욕에 대항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뿐이라며 침략 혐의를 부인하려 애썼다. 실제 소련과 중국이 확장정책을 구사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 공산주의 봉쇄 선언을 발표한 1947년 3월 12일 이후였다. 그리스와 터키가 소련의 패권확장에 맞서 싸우고 있다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 지원을 요청했던 시기만 해도 이미 전쟁이 끝난 뒤였다. 그런 만큼 변호인단의 주장에는 시기상 모순이 있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는 냉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웹 재판장은 변호인단이 냉전논리를 끌어들이는 것을 막으려 안간힘을 섰다.

1947년 4월 피고측 변호인 조지 래저러스는 "일본이 중국에서 행한 일들은 모두 공산주의 확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유 있는 공포' 였다."

"우리가 보기에 트루먼 대통령이 말한 것은 그동안 일본이 말해왔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시기상으로 약간의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은 1937년 중국 사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예견했던 것을 입증하는 자료로 손색이 없습니다" 

웹 재판장은 법정에서 연합국의 일원, 특히 소련을 비방하는 소리를 묵과하지 않겠노라 선언하면서 이 말을 비판했다.

"미국인 변호사로서 연합국의 법정이 베푼 크나큰 관용을 악용해 분별없이 적의 편에 서서 악의에 찬 선동을 퍼뜨리는 우를 범하지 마시오"

래저러스는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우리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말이 적의 선동으로 불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웹 재판장은 래저러스 변호사와 충돌한 직후 변호인단이 모인 자리에서 "당신들의 언사를 볼 때 일본의 선동가나 다름없다" 며 성토했다. 피고측이 만주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소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려 하자, 재판부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된 문서들을 모두 기각해버렸다. 이 점에서 도쿄 재판소는 워싱턴의 전적인 지지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의 '반공산주의 십자군' 에 등을 돌린 유일한 기구였다.


'반평화' 죄목은 도쿄 법정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는 '침략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지구촌을 1940년대 후반의 '현 상태 status quo' 대로 굳히려는 의도가 숨이 있었다. 뉘른베르크의 수석 검사 로버트 잭슨은 '어떤 나라가 무슨 불평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침략전쟁은 불만을 해결하거나 그런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합법적인 수단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었다. 다시 말해,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재판헌장에 입각할 경우, 당시 아시아의 화두였던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은 금지된 것이었다. 전쟁 또는 이른바 '무력을 통한 자위'가 금지되었고, 식민지들은 순순히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의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어떤 경우라도 평화에 대한 그런 안이한 인식은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 '현 상태'라는 것은 피지배국이 평화의 이름으로 영원한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이라고 역설했다.

식민지 문제는 재판소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시아와 태평양 국가들은 아직도 백인 식민지 열강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는 재판 후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연합국은 한편에서는 침략적인 외교정책을 들어 일본을 소추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들을 무례하게 팔꿈치로 밀어제치며 이미 체결되어 있던 식민지 협약을 멋대로 어기고 있었다.

일본을 고소하기 위해 나선 당사자는 중국과 필리핀을 제외하면 식민지였던 나라들(한국, 포르모사, 만주)도, 일본에 점령되거나 그들과 싸웠던 나라들(말레이시아, 동인도 제도, 버마, 뉴기니 등) 도 아니었다. 사실 이런 나라 중 그 어디도 참가초청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때문에 지배권에 방해를 받았던 식민지 열강(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호주)이 도쿄 재판소에 나타나 일본을 꾸짖고 있었다. 미국측 검사 솔리스 호로비츠는 일본이 꼭두각시 정권을 앞세워 중국을 강탈했다고 고발했다.

 "일본 관리들이 핵심 요직에 기용되고, 경제체제를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일본의 보호와 감독 하에 국책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입의 일정 부분을 강압적으로 은행에 예치하도록 만들었으면서도, 은행의 이권은 일본인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일본 이주민들이 땅을 몰수하고 약탈하는 사이 중국 농부들은 황무지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18세에서 45세까지 중국인들은 모두 일본군에 들어가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중국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중국의 자원과 부는 약탈당하고, 파괴당하고, 고갈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후 한 중국 교수는 도쿄 전범재판에 관한 세미나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중국을 가장 먼저 약탈한 사람들은 영국인들이었다. 그러나 도쿄 재판에서 영국은 심판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쳐들어왔고, 프랑스가 밀고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미국이 남은 것을 챙겼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모두 똑 같은 도둑이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유럽인들이 일본의 철수를 도우면서 다시 지배권을 회복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총독부가 전쟁기간 동안 100만여 명이 기근으로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비축식량을 약탈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 일본은 1944년 이곳에서 프랑스를 축출했다. 1945년 8월 파리의 특사들이 하노이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반겨준 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죽음을" 이라고 외치는 폭력 시위대였고, 이를 제지해준 것은 일본군이었다. 그 다음 달 미국 전쟁범죄조사단이 악명 높은 일본 헌병대 요원을 체포하러 사이공에 도착했다. 하지만 조사단은 영국, 프랑스, 인도 점령군이 공동의 적인 월맹과의 싸움을 위해 그 요원들에게 다시 총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획을 연기했다.

 

도쿄 재판은 법정에 선 전범들의 면면만큼이나 끝까지 소환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의혹으로 유명한 재판이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수상쩍은 사람이 바로 히로히토 일왕이었다. 각료 중 일곱 명이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는 한번도 소환을 당하지 않았다. 처음에 미국은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정치 고문관이었던 조지 애치슨은 히로히토가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6년 1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일왕은 틀림없는 전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 점령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왕을 쓰러뜨리면 나라가 분열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정말로 히로히토가 혼돈을 막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다. 아니면 그 옥좌를 자신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과 동일시했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일왕은 맥아더가 이끄는 함선의 허수아비 선장이 되어 피고석 출두를 면제받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히로히토가 명목상의 왕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 기간 동안 일왕은 왕궁에 격리된 채 나비 채집으로 소일했고, 군대가 일을 꾸미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일왕을 '완벽한 찰리 맥카시 Charlie McCarthy (복화술사가 조종하는 인형)' 로 묘사했다. 한편 법정 안에서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연합국이 히로히토에게 죄를 떠넘기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썼다. 한번은 미국 관리가 피고측의 조지 래저러스 변호사에게 형무소에 수감 중인 군 관련 피고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이 때 그는 이들 피고의 증언 시 처신 요령과 아울러, 히로히토가 의전상 참석해야 하는 회의에서 군사 작전과 계획이 논의되었을 때 그의 참석은 단지 상징적인 의례였을 뿐임을 치밀하게 주입시켰다.

사실 일왕은 전시정책에 대해서만 개입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외교정책의 실행을 최종적으로 지시했고, 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고관을 가차없이 낙마시켰다. 프랑스측 검사 로베르 오네토의 말처럼, 일왕은 "그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도 거절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오네토는 "그의 재판 궐석은 기소에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피고들이 자신들의 혐의를 알게 모르게 일왕에게 돌리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도조 히데키에게 일왕의 의지를 거스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일본 국민, 특히 고위 정부관리라면 왕의 뜻에 반대하지 않을 것" 이라고 대답했다. 히로히토의 궐석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구태여 숨기지 않았던 윌리엄 웹은 판사석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다 "그래요, 저 대답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잘 알겠지요" 라고 빈정댔다.

1948년 1월 영국측 검사 아서 커민스 카는 법무부 장관 하틀리 쇼크로스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모두가 일왕에게 공공연히 충성심을 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왕이 유죄라는 실질적인 증거가 아닌가"

그가 진주만과 여러 지역의 공격을 승인해주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서방 언론은 좀더 비판적인 논조를 띠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는 히로히토의 양위를 요구했고 맨체스터 가디언은 그가 법정에 출두하지 않음으로써 재판에 '비탄스런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했다. 미국 외무부는 '일왕은 유죄를 피할 길이 없다' 고 전망하기도 했다. 몇 년 뒤 1950년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엄격히 법적으로' 히로히토가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 것은 일왕만이 아니었다. 전쟁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약탈행위들 역시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731부대의 세균전 의학실험에 대한 논의는 미국이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관리들과 사면의 대가로 연구자료를 제공받기로 밀약한 대가로 중지되었다. 중국인들이 겪었던 끔찍한 수난에 관한 문제 역시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에 자행한 전쟁범죄에 초점이 맞춰질 것을 우려했던 까닭에 제기되지 않았다.

 

열한 명의 판사는 전쟁유죄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편이 갈렸다. 도쿄 재판이 시작될 무렵에 종결된 뉘른베르크 재판과 비교되는 데도 매우 민감했다. 1947년 3월 뉴질랜드인 판사 하비 노스크로프트는 본국으로 절망적인 편지를 썼다.

"저는 이 긴 재판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법정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 다룬들 그것이 법에 부합하는 것인지 또는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를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법정이 심각하게 분열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국제법상으로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한발 한발 내디뎌온 그 모든 노력들이 허무하게 좌초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려는 본국으로 돌아간 서방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되었다. 영국의 전직 주 도쿄 대사였던 에슬러 데닝은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우리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해 서방이 전권을 장악한 재판소를 극동에 설치했다. 만약 도쿄 재판이 임무를 완수하는 데 실패할 경우, 서방의 정의는 일본뿐만 아니라 온 극동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도쿄에서 판사들은 윌리엄 웹 재판장이 재판부의 일원이 아니라 법정의 우두머리인양 행세하며 다혈질이고 난폭하다는 불만을 터뜨렸다. 뉴질랜드 수상 피터 프레이저는 수상 벤 치플리에게 그의 소환을 요청했고, 1947년 11월 웹 재판장은 결국 본국으로 소환되어 미국인 판사 마이런 크레이머가 새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소추위원회 역시 내부적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의 경우 영국측 검사 커민스 카는 그가 상습적 음주 때문에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할 지경이라고 자주 런던에 보고했다. 영국의 법무부 장관 하틀리 쇼크로스는 1948년 1월 키넌이 무능하기 이를 데 없고 술독에 빠져 지낸다고 대법관에게 보고했다. 한 영국 외교관은 그가 도조 히데키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도조의 재판은 박스오피스 최고 흥행작이었다. 적의 두목이 재판정에 나타났다는 상징적 장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방청석을 가득 메운 채 스타가 벌이는 스펙터클한 한판 승부에 만족했다. 도조의 빠른 두뇌회전, 명쾌한 답변, 카리스마, 그리고 상대(키넌)를 다루던 솜씨는 왜 도조가 일본의 전시 지도자였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도조의 변호인 키요세 이치로는 침략과 공모 혐의에 대해 250면에 달하는 진술서를 내놓았다. 그것의 핵심은 일본이 침략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단지 합법적인 국가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서방과의 갈등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도조는 이 재판을 통해 일전에 서투르게 자살을 시도한 데 실망했던 일본인들의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쿄 주재 영국 대사관은 본국으로 타전하는 전보에서 "끝까지 일왕을 보호하고자 한 충성스러운 모습 그리고 스스로를 패배의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친 도조의 행동은 일본 국민에게 안도감과 함께, 그기 '진정한 일본인답게' 고소인들에게 당당히 맞섰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변호인단의 재판 준비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피고들은 일본과 미국 변호사들에게 할당되었다. 미국인 변호사들은 나중에 맥아더로부터 부당하게 '악덕 변호사' 라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열성적으로 변호했다. 그러나 자금, 통역관, 조사원, 타자수, 사무직원 등 모든 여건이 열악했고, 증거와 증인을 조사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법정규칙은 모호할 때가 많았다. 증거와 절차를 다루는 전통적 규칙은 적용되지 않았고, 재판장은 검사가 이미 제기한 사안에 대해서만 질의하도록 증인신문을 제한했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과연 몇 명의 판사들이 참석하게 될 지도 예측할 수 없었고 어떤 증거가 채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결론을 얻어낼 수 없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짐에 따라 여론은, 특히 미국의 여론은 재판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이 뻔했다. "결국 시간은 피고의 편에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공방을 질질 끌어 형량을 낮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12일, 2년 6개월을 끌고 4만 8412면에 달하는 증언기록을 남긴 채 재판은 종결되었다. 법정은 일본 수장들의 전쟁범죄와 침략전쟁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일곱 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열여섯 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무죄로 석방된 피고는 아무도 없었다. 두 명의 피고는 미국 연방 대법원에 항고를 하려 했으나 연합국이 나서는 바람에 대법원은 그들의 재판을 다룰 권리가 없다고 결론지어버렸다. 그 동안 미국은 1945년 8월부터 수감되어 2차 공판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A급 전범들을 풀어주었다. 도쿄 재판은 누가 보아도 정치적 실패작이었다. 아무도 재판이 다시 열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판사들은 일본에게 전쟁의 죄를 묻는 문제에 대해 첨예한 입장차이를 보였다. 다수파는 재판부가 처벌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좀더 강경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소수파 중에서는 세 명의 판사가 판결문에 공식 반대한다는 입장을 각자 개진했고, 네 번째 소수파인 웹 재판장은 '별도 의견서' 를 제출했다. AP통신 프랭크 화이트에게 한 판사는 "재판부는 사형선고를 둘러싸고 사분오열되었다"고 전했다. 피고인 중 히로타 코키는 단 한 표 차이로 교수대에 보내졌다. 처형방법을 놓고도 의견이 갈렸는데 결국 총살 대신 교수형으로 정리되었다. 영국 공관은 "이는 일본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피고인들의 유죄판결도 석연치 않다는 의구심을 가지가 할 수 있다"고 했다.

웹 재판장은 "전쟁을 개시하고 종결짓는 과정에서 일왕이 담당한 결정적인 역할이 소추위원회가 제시한 증거들의 주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일왕이 소추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판단은 그들의 몫이었겠지만 영국 법정은 주모자란 으레 당연히 처벌을 면하게 마련임을 고려에 넣었을 것" 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런던 행정부는 웹이 영국 법정을 언급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고 맥아더 사령관은 "웹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반 히로히토 정서에 편승하고 있다" 고 비난했다.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자신의 주장을 장장 1235면에 걸친 대문서로 내놓았고, 나중에 원자폭탄 희생자와 참혹한 파괴현장을 담은 사진을 꾸며 캘커타에서 책으로 발간하면서 재판소의 권위를 부정하기까지 했다. 그는 "식민열강은 아시아 정부들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일본과 똑같거나 더 나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고 주장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폭격한 것은 제1,2차 세계대전 때 독일제국과 나치 지도차들이 수행한 작전들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만행이었다고"고 힐난했다.

이 인도 판사의 주장은 법순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도쿄식으로 법을 개정하는 데 반대하고 이미 존재하는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내 판단으로는 현재의 국제법에 제시된 규칙을 무시한 채 새로운 범죄를 정의하고, 그 법에 따라 죄인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은 승전국의 권한을 넘어서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소급입법을 혐오하는 한, 이것은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어떤 나라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이는 곧 국제법에 반해 권력을 함부로 침탈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다."

팔은 맹렬한 반공산주의자였으면서도 식민주의에 대한 강한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시아 민족주의는 당시 인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수년이 지난 뒤 네덜란드 판사 베르나르드 필링은 이렇게 회고했다.

"인도 판사는 작금의 식민지 현실에 가장 분개했다. 200년 전 유럽이 아시아를 정복한 뒤로 지금까지 지배권을 누리고,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일본의 전쟁, 그야말로 '아시아 민중을 위한 아시아' 라는 슬로건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 같았다. 그는 인도군에 입대해서 일본군과 함께 영국군에 대항해 싸우기도 했다. 그는 철두철미한 아시아인이었다."

실제로 관련 보고서들은 비록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인도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들이 희생되었지만, 인도 언론이나 대중은 팔이 재판에 대해 보여준 반대견해를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그들의 식민종주국 영국에 대한 반감이 더 컸음을 시사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앙리 베르나르 판사는 "나는 일본의 장성, 외교관, 정치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데 바쳐진 이 재판이 실로 우리가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 며 기독교적 관용을 호소했다. "인간의 목숨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냉혹하게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전쟁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폭력적인 수단이다. 전쟁의 승자는 누구든지 득을 보고, 아무도 그를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 브렌누스가 이야기했듯이 "패자는 비참하도다 Vae Victis"

도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세계의 정치지도는 바뀌고 있었다. 중국은 어느새 아시아에서 새로운 위협적 존재로 떠오르고 반면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반공산주의 동맹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어제의 적들 사이에 새로운 동맹관계가 맺어졌다. 1952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정을 끝냈지만 수감 중인 전범들은 여전히 마찰의 불씨였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의 고초에 감상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의 석방운동은 조금도 수세적이지 않았으며, 실제로 정부관리들이 주도하고 일본 왕실까지 나서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53년 한 영국 외교관은 캐나다 대사 초청 칵테일 파티에 참석했을 때 타카마츠 왕세자가 초청인사들을 붙들고 전범들의 석방을 강하게 요청했다고 보고했다.

영국 외무부는 전쟁포로수용소 생존자들의 의견에 동정적이었고, 도쿄 주재 대사관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대사관은 외무부의 일본 태평양국이 "전범 문제를 다루는 데 대사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시했다. 도쿄 대사 에슬러 데닝은 "정치적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본국 정부는 몇몇 영국인들의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데 연연하고 있다. 처벌을 당한 패자의 마음에는 우리의 적들에게 이용당할지 모를 불만이 자라나고 있다"고 불평했다.

도쿄 재판에 대한 역사의 판결은 데닝의 예언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이 재판은 흔히 '실패한 뉘른베르크'로 일컬어진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연합국의 단결력이 겉보기에 아직 완전했을 때 열렸지만, 도쿄는 그것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각국이 독립을 회복한 서구 유럽에서 열렸고, 도쿄는 아직도 각국이 자유를 부르짖고 있던 아시아에서 열렸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소추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갈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The Rise and Rise of Human Rights: Human Rights and Modern War - Kirsten Sellars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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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이 되기 몇 달 전, 알 카에다 신병을 모집하는 비디오테이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밀반출돼 아랍 세계 전역에 유포됐다. 오사마 빈 라덴과 고위 참모진은 무슬림 젊은이에게 이슬람을 보호하고 전파해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가 있다고 설파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원년인 622년, 예언자 모함메드와 "추종자 sahaba" 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면서, 현재 아랍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서구 문명의 유해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서구 문명의 폐해를 치료할 방법은 오로지 신의 말씀에 있다. 바로 히즈라 hijra와 지하드jihad이다"라고 덧붙였다.

히즈라는 무슬림이 종교 deen 적 의식을 거행할 수 없는 곳에서 이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땅으로 이주하는 것을 말한다. 지하드는 신의 뜻을 받들고 기리기 위한 전쟁을 의미하여 이는 무력을 강조한 오사마 빈 라덴의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모함메드는 메카에 이슬람을 뿌리내리기 위해 13년 동안 고초에 시달렷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메디나로 이주하는 것이 탄압을 피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가 될 것이라는 계시wahi에 따라 이주를 결심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틈을 타 모함메드와 무슬림 추종자는 이교도 jahili 의 눈을 피해 메디나로 피신했다.

히즈라는 당시 모함메드의 이주에서 비롯됐다. 무슬림에게 정신적 영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비디오테이프에서 언급한 지하드는 624년 모함메드가 바드르 Badr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이교도를 모두 처단하고 메카로 금의환향한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빈 라덴은 미국과 서구세게에 항전하다가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등지로 피신해 다닌 본인의 경험을 622년 모함메드가 메디나로 이주했던 것에 비춰 이야기했다. 이는 빈 라덴과 추종자 세력이 예언자 모함메드가 그랬던 것처럼 무슬림 전체를 대신해 수모와 박해를 감수하며 희생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궁극적으로는 신의 뜻과 예언을 받들어 "의로운 전임자 salaf"를 추종하는 빈 라덴 세력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적 메시지도 담겨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21세기의 메디나였던 것이다.

꾸란 Qur'an 에서 지하드에 대한 공식 승인은 메디나 시기에 이르러 처음 언급됐다. "침략하는 자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이 너희[신도]에게 허락되나니 모든 잘못은 그들(불신자)에게 있노라. 신은 전지전능하사 너희에게 승리를 주시니라. '우리의 신은 오직 알라뿐' 이라고 말한 것으로 말미암아 부당하게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이 있노라" (22:39~40) 모함메드는 메디나에서 전쟁 gital 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전쟁은 이제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됐다. ("비록 싫다 해도 너희에게 지하드가 허락되었노라. 너희가 싫어하나 복이 되는 것이 있고 너희가 좋아한다 해도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신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2:216) 이것은 일종의 회개 tawba 이자 신과의 언약이었다. "신을 섬기는 사랑의 생명과 재산은 모두 신의 것이며, (대신) 신도는 신의 품에서 살 수 있다. 그들은 신의 뜻을 섬기기 위해 싸우고 죽고 죽인다: 법과 복음과 꾸란을 통해 절대 복종을 약속한 것이니, 신보다 복음에 더 신실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전쟁에 대한 승인은 바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의무로 이어졌다. 모함메드는 무슬림에게 지하드를 실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므로 그대 혼자서라도 신의 뜻에 따라 투쟁하고 신도를 격려하라. 신께서는 불신자를 미리 제지해 주시리라. 신은 힘이 있으시되 가장 강하시고 벌을 주시되 가장 큰 것을 주시니라" (4:84)

지하디스트의 여정은 멀고 험난한 길이었고 신의 뜻을 섬기는 무슬림은 예측 불허의 길을 떠나야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했던 모함메드를 언급하면서 무슬림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지원과 도움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 과연 얼마나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30년 넘게 계속된 이슬람을 둘러싼 분열은 무슬림의 사회기반과 정치체제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혼란은 아랍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긴장은 멀리 뉴욕, 워싱턴, 마드리드, 런던, 파리 등지에까지 미쳤다. 현대 지하드주의 jihadism 의 궁극적 목적은 무신론이 지배하는 국내외 정치,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이슬람 교리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지하디스트 간 내분이 심화됐고 오사마 빈 라덴과 이인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 Ayman al-Zawahiri 는 지하디스트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계획을 구상했다. "가까운 적 al-Adou al-Qareeb" (무슬림 이단자, 변절자) 이 아닌 "먼 적 al-Adou al-Baeed" (이스라엘과 미국 등 서구 세계) 을 대상으로 삼은 투쟁이 시작됐다. 무슬림 대부분은 아랍 세계의 내분과 갈등 고조의 원인으로 미국을 꼽았다. 알 카에다 지하디스트는 미국을 상대로 한 자신들의 투쟁이야말로 이슬람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고 믿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을 통해 자신과 추종자를 포함한 숨은 세력을 무슬림 세계에 보여주고, 자신들이야말로 이슬람 공동체 ummah 를 이끌 지도자임을 알리려고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 같은 대담한 공격만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성공여부는 오직 미국의 반응에 달려 있었고, 빈 라덴은 미국이 알 카에다에 반격을 하고 9.11과 상관없는 국가까지 가세한다면 분노한 무슬림이 지하드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작 아랍 사회에서 알 카에다에 가담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실제로 9.11은 무슬림 사회의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서구 언론은 지금도 9.11이 이슬람 공동체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또 당시 자살폭파 대원 19명의 존재는 무슬림 정치 문화의 비 도덕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슬람 공동체에서 계속되는 자살폭파와 참수 같은 사건은 이러한 평가가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9.11은 이슬람 공포증을 고조시켰으며 이슬람 지하드주의는 서구 세계에 이슬람과 일반 무슬림이 죽음의 문화를 수용하고 전파시킨다는 잘못된 관념을 강화시켰다.

많은 무슬림 젊은이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정치, 문화적 억압에 시달리며, 직장을 구하지 못해 집을 얻거나 결혼 자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미묘한 시선을 항상 느껴야 했다. 젊은 무슬림은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집단 처벌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근본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한다. 현재 30세 이하 무슬림은 이슬람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한다. 그들은 권리를 상실한 채 거대한 유권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좌절한 젊은이가 모두 폭력성을 띄거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즘은 아랍 세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뿐더러 아랍 세계의 전유물도 아니다. 수십 년 전, 온갖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내세운 유럽 무장 단체가 전 유럽을 초토화하고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 테러리즘의 잔학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조차 이러한 위기가 유럽과 서구문화, 종교타락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서구 기독교 부패가 문제 원인이라고 역설한 사람도 없었다.

일부에서는 알 카에다 테러 전술이 이슬람의 전통 지하드 기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최근 유럽에서 형성된 일련의 급진적이고 진보적 운동 또는 제 3 세계 운동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허무주의를 용인하지 않는 이슬람에서 알 카에다는 예외적 분파이다. 알 카에다는 자신의 고행이 모든 무슬림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들의 정치 투쟁을 종교적 수사로 선전한다. 오사마 빈 라덴이 지하드를 외면하는 동료 무슬림을 질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믿음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다른 어떤 것도 우선시 될 수 없다. 믿음 없이 어떻게 종교가 존속될 수 있겠는가. 나라의 존속과 영광이 모두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 적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만 종교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너희가 예루살렘과 이라크에서 서구 세력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이 너희를 몰아낼 것이다. 또한, 너희에게서 성지의 땅[사우디아라비아]를 빼앗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바그다드를 빼앗았고 내일은 리야드 Riyadh 를 점령할 것이다"

과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자 그 안에 억눌려 있던 정치, 사회적 갈등이 쏟아져 나왔고 소수집단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마음대로 분하라고, 뒤이어 민족주의 국가가 건립되면서 시작됐다. 반유대주의는 애초에 유럽에서 발생했다. 반면, 이슬람 공동체에서 반유대주의는 갑작스럽게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강제 추방되면서 생겨났다. 여전히 무슬림 인종 차별주의자가 접하는 글들은 주로 유럽에서 나온 반유대주의 선동문 (시온의정서나 홀로코스트 부정론 등) 이다. 반유대주의 정서는 다분히 정치적임에도 순전히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유럽인과 유대인의 인종적 차이에 근거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아랍 세계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아랍인과 유대인은 같은 셈족이고 박해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의 아랍인은 자신들이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요르단의 대표적 이슬람주의자 라이트 슈비알라트 Laith Shubialat 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인종을 배척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언론에서는 연일 불안정한 아랍 사회 소식을 보도한다. 물론, 중동 지역에서 정치 격변이 지속된 건 사실이다. (중동은 이슬람이나 무슬림과 동의어가 아니다. 중동 지역 내 모든 무슬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무슬림이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으며 이 지역에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도 많다) 잇따른 자살폭파 사건은 아랍 세계에 야만성과 폭력성이 만연해 있다는 편견을 증폭시켰다. 서구 국가들은 값싼 아랍산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세계 경제가 중동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흔들릴까 우려한다. 다만, 한 세기 이전 서구 식민주의가 이 지역의 자유와 자결에 대한 열망을 꺾었다는 건 분명하다.

서구식 정치 체제는 취약하나마 무슬림 지역 내에 뿌리내렸다. 현재의 국경선이 재편성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지역 내 지배자는 기존 정치 질서를 유지할 광범위한 유인책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강대국 역시 이 지역에 많은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이 이웃 국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이라크의 속국으로 편입시켰을 때, 미국은 페르시아만에 50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강대국은 이 지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이익을 챙겨갔다. 서구 세력의 영향으로 권좌에 오른 아랍 독재자는 자신의 생존을 서구 국가에 의탁하는 대가로 충성을 서약했다.

식민주의 개입이 아니더라도 국가형성 과정에는 장기간에 걸쳐 복합적이고 큰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레바논과 무슬림 국가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정치, 사회 발전은 역사적 패턴과 대체로 일치한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는 민주주의가 안정권으로 진입하기 전에 유혈 투쟁을 경험했다.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슬림 국가는 종교적 언어와 색채로 발전단계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강력한 반체제 수단으로 등장한 이유는 권위주의 무슬림 지배자가 세속적, 진보적, 비종교적 반대파를 성공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한 이집트 무장 이슬람주의자는 "오늘날 아랍 정치권 내에서는 세속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민족주의자는 전혀 발 디딜 틈이 없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무슬림 독재자조차도 시민사회의 중추이자 반체제 조직의 피난처가 된 모스크를 장악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제한적 민주주의의 직접 수헤자는 지하디스트나 자유 민주주의자가 아닌 주류 이슬람주의자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슬람 활동가는 이집트, 이라크, 이란,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 파키스탄, 쿠웨이트, 터키 등지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하마스(Hamas: Islamic Resistance Movement)가 예상을 뛰어넘는 큰 차이로 승리했을 때 전 세계는 긴장했다. 132석 중 74석을 차지한 하마스는 겨우 45석을 얻은 기존 파타 Fatah 당을 권좌에서 내몰았다.

무슬림 표가 주류 이슬람주의자의 입지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속주의 지배자는 일자리 창출에 실패했고 각종 사회 복지혜택과 교육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 또, 외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국방력을 강화하지 못했다. 점점 더 많은 무슬림이 기존 정치권의 무능함헤 회의를 느끼고 이슬람주의자가 좀 더 효과적 대안이라고 믿었다. 무슬림은 이슬람주의자의 청렴함에 감명받았고, 세속주의 정권의 실책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에 통쾌함을 느꼈다. 또한, 하마스 같은 이슬람주의자는 누군가 자살폭파 때문에 사망하더라도 남은 가족의 생계와 건강을 돌봐주고 최빈곤층 자녀에게 무상 초등교육을 제공하는 등의 정책을 썼다.

하지만 이슬람주의자 역시 대중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민생복지에 힘쓰지 않고 군사적 모험만을 감행한다면 세속주의자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무슬림 유권자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도 아니다. 그들은 정부의 탄압과 부패, 무능함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정치인을 내쫓으려는 의지도 있다.

이슬람 모스크는 민주주의의 요람인가 아니면 호전주의의 발상지인가? 모스크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한 것으로 보인다. 지하디스트는 대원을 모집하거나 각종 전략전술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에 모인다. 거의 모든 사람이 특정 모스크에서 "부름"을 받고 그 모스크를 중심으로 지속적 교류를 나눈다. 9.11 자살공격 대원이 처음 지하드주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유럽 모스크 내 회합이었다.

대다수의 모스크는 순수하게 종교 의례를 거행하고 참배와 명상을 위한 장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많은 사제가 정치적, 종교적 반체제인사를 모스크에 수용하고 극단주의자가 피신할 수있도록 허용한 것 또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수사 뒤에 감춰진 정치적, 사회적 목적이나 열망을 파악하는 것이다. 종교적 수사는 체제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나 조직이 "가까운 적" 과 "멀리 있는 적" 모두에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기이다. 이슬람은 세속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이들을 지원해왔다. 세속 민족주의는 이미 수십년 동안 시민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 파탄과 군사적 패배를 가져왔다. 지하디스트들은 1967년 아랍 세계가 이스라엘에 패했던 사건을 기점으로 "변절한" 지도자에 대한 저항이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무장 이슬람주의로 재무장한 지하디스트는 실패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부패한" 서구 자유주의에 대항해 전면전을 선언했다. 이들은 무능한 무슬림 지배자를 내쫓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종교가 정치를 위한 도구가 된 셈이다.

지하디스트의 투쟁은 종교가 아닌, 정치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꾸란에서 테러리즘을 장려한다는 비난은 신약성서에서 십자군을 장려한다는 비난처럼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는 수많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같은 구절이라도 평화와 관용을 도모하는 것으로도, 전쟁과 편협을 부추기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문제는 종교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무슬림과 "이슬람주의자"는 이슬람이 ㅁ웟인지에 대한 견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이슬람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무슬림은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평신도지만, 이슬람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은 권력을 장악해 국가와 사회 전체를 위로부터 이슬람화하는 것이다. 지하디스트에도 많은 부류가 있듯, 이슬람주의자 중에서도 온건주의에서 주류 이슬람주의, 호전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조직이 존재한다. 수니 Sunni, 시아 Shiite, 살라피 Salafi, 수피 Sufi, 와하비 Wahhabi 파 등은 부족(오늘날은 국가)과 철학적 전통 (어떤 종교 문구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 차) 에 따라 분류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이슬람주의는 대부분 수니파이다. 사우디에는 살라피와 와하비파가 혼재되어 있고 이란 이슬람주의는 대부분 시아파이다. 종파들은 여러 방식으로 교차하고, 상호 영향을 주며, 결속하거나 분리되기도 한다. 특정 종파는 다른 종파에 비해 더 배타적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법 Shariah 에 따라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정부를 수립하려는 공통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이 목적 외에 '이슬람' 외교 정책이나 '이슬람' 경제 정책에 대한 종파 간 합의가 부재하여 구체적 사회 모델도 제시하지 못했다.

무장 이슬람주의자, 지하디스트들의 시각은 급진 좌파에서 급진 우파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하다. 놀랍게도, 그들의 견해는 자신들이 반대하는 세속주의 지도자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슬람은 무슬림의 도덕성, 정체성, 서구화와 미국화에 대한 두려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는 이슬람을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 종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란, 수단, 과거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가 궁극적으로 건립하고자 하는 정권 역시 세속주의 독재정권만큼이나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적 수사와 상징이 넘쳐나지만, 이들의 내부 통치체제에서 특별히 이슬람의 고유한 요소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란인과 수단인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경제난을 우려하고 있고 이슬람학자와 이슬람주의자가 조장하는 사회정치적 불안정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탈레반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정권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초기 단계의 정부마저 붕괴시켰다. 이는 이슬람 국가 건설 가능성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란, 수단, 아프가니스탄 같은 국가들은 이웃 국가와 다른 지역에 혁명을 파급하는 데 자신의 빈약한 자원을 소진해 버렸다. 혁명을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려 했던 시도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특히 국제화된 지하드를 목표로 하는 알 카에다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탈레반은 치명타를 입었다. 9.11 이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정권 통치하에 있는 이란, 수단 정부는 내부적으로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더 번째 역설은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가 무슬림 세게에서 정치적 공방과 논의를 심화시키는 데 간접적이지만 적극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터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의 세속적 전제군주에게 정치 체제를 개방하고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가 없었다면, 아랍 세속주의 독재자는 결코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의지를 갖추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디스트는 서구 민주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의도와 다르게 아랍 지역 내 민주적 변화를 주도했다. 심지어 일부 이슬람주의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더 광범위한 개혁을 주장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드 조직인 알 자마 알 이슬라미야 (Al-Jama'a al-Islamiya)와 알제리의 이슬람 구국 전선(Islamic Salvation Front)은 현재 민주화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됐다.

그러나 민주화를 주장하기까지 이들이 거쳐 온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피로 점철된 역사였다. 그들은 가부장적이고 스스로 신앙, 전통, 그리고 정통의 수호자라고 자신한다. 주류 이슬람주의자조차 여성의 권리 신장이나 예술가의 표현 자유에 반대했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주의자는 여성의 투표권이나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튀니지, 알제리, 파키스탄, 다른 무슬림 국가의 이슬람주의자는 여성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을 할 수 있는 권리, 남성의 승인없이 여행하는 권리, 의회나 정부 기관에서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 법률 제정을 반대한다.

많은 이슬람주의자, 지하디스트가 세속주의와 타협하고 자신의 견해를 재고하고 있다. 무슬림 사회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종교보다는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고, 전제적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적 소환(Da'wa)을 통해 아래로부터 점진적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보수적 "신 원리주의" 가 권력쟁취를 통해 위로부터 급진적으로 사회를 이슬람화하는 혁명적 지하드주의를 서서히 대체했다. 그러나 이는 알 카에다를 포함한 호전주의 세력과의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알 카에다에게 이라크 전쟁은 행운이었다. 내부 혼란에 대한 우려를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투쟁에 신뢰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사건이었다. 미국 관료들 역시 이라크 전쟁이 결과적으로 알 카에다가 신병을 모집하고 조직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사회의 급진적 이슬람화를 추구했던 세력이 둔화하는 추세를 바꿀 수 없었다.

지하디스트가 국제 사회와 일반 무슬림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일부에서는 노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일부 소조직이나 분파가 자행하는 테러리즘은 계속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테러리즘이 더 넓은 지지층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은신처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하디스트는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을 자극해 이슬람 공동체가 피해를 봤다는 비난을 국내외로부터 받고 있다. 오로지 기적만이 지하드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혹자는 이라크가 계속 점령지로 남는다면, 그것이 기적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  Fawaz A. Gerges "Journey of the Jihadist: Inside Muslim Militancy"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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