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독신 산양치기 처녀 마르셀라를 사모하다 자살한 (수많은) 청년 (중 하나인) 그리소스토모의 장례식에 느닷없이 죽음의 주인공(?) 마르셀라가 나타나다. 그녀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경탄의 탄성조차 내뱉지 못한 채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상주 암브로시오가 마르셀라를 비난하다


“이곳엔 우연히 온 것인가? 오, 산 속의 잔인한 바실리스코 괴물이여! 네 등장과 더불어 너의 냉담 때문에 목숨을 잃은 불쌍한 자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기 위해 왔는가? 혹은 네 잔혹한 행적을 뽐내기 위해 왔는가?”



“오 암브로시오! 나 자신을 해명하러 온 것이며, 그리소스토모가 받은 고통과 그의 죽음을 모두 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지 말씀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이 제게 아름다움을 주셔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이 제 아름다움이 저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고 말씀하지요. 

여러분이 제게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이유로 제가 여러분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만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더욱이 ‘아름답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비록 못생겼더라도 나를 사랑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요.


진정한 사랑은 깨지지 않으며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왜 제게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줄 것을 강요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하늘이 저를 아름답게 만들었듯이 저를 못생기게 만들었다면 여러분들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가 불평하는 게 옳았겠습니까? 하물며 저의 이 아름다움은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은혜일 뿐 제가 달라고 한 적도, 선택한 적도 없었습니다.


만일 정절이라는 것이 육체와 영혼을 더욱 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미덕이라면 왜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랑받는 여인이 그저 재미로, 그리고 강압적으로 달려드는 남자의 의도에 의해 정절을 잃어야만 하는 겁니까?


저는 그리소스토모에게 아무런 희망도 준 적이 없고, 그건 다른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잔혹함이 그를 죽였다고 하기에 앞서 그의 집착이 그를 죽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저는 자유로우며 구속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요. 이 사람을 속이고 저 사람에게 구애하지 않으며, 한 사람을 농락하고 다른 이의 마음을 유혹하지도 않았답니다. 이 마을의 양치기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산양을 돌보는 것이 제 기쁨이지요. 결국 이 산이야말로 제 갈망의 대상이며, 만일 제가 이곳에서 발걸음을 내디뎌 제 영혼이 본향을 찾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천국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함일 것입니다”



-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Don Quixote of La Man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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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porate savings - Dead Money


통화 팽창 정책은.. Thomson Reuters 에 따르면 미국에서 3분기 S&P500 기업매출과 마진은 2009년 이후 최초로 하락했다. European Stoxx 600 기업의 절반 이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수익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유력한 용의자 아니 용의 기업은 거울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기업들은 기술컨설팅서비스로부터 반도체 장비 업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예산을 삭감해 왔다. 영국의 홍보/마케팅 전문 기업 WPP의 마틴 소렐 경이 ‘회색 백조’ (검은 백조와는 달리, 사람들이 대충 알고 있는) 라 칭해 왔던, 네 가지의 불안 요소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 유로존 위기, 중동의 격변, 중국의 예견된 경기둔화, 그리고 미국의 경제건전성과 재정절벽. 


이것들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불황이 종료된 이후로 투자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수익만큼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명목자본지출은 07년 대비 6% 상승했는데 내부현금유입은 32% 증가했다. 기업은 2008년 이후 자금의 수요자 대신 순공급자가 되었고, S&P 500 기업들은 9천조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년 대비해서는 약간 감소하였지만 08년 대비해서는 40% 증가한 수추이다.


비즈니스 리더와 보수적인 논평가들은 이러한 현금의 산이, 귀찮은 연방 규제와 미국의 높은 법인세가 투자를 저해하고 현금을 잠그게 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왜 같은 현상이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일본의 기업유동자산은 2007년 이후 75% 증가하여 2.8조 달러에 도달했다 (ISI 그룹 추산). 현금비축량은 영국과 캐나다에서도 정책입안자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Mark Carney 가 ‘죽은 돈 Dead money’ 이라고 묘사하기도 한, 캐나다 기업들의 현금비축량은 3천억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2008년 대비 25% 상승한 것이다. Carney 총재는 ‘돈을 굴리든지, 뭘 할지 모르겠으면 주주들에게 돌려주기라도 하라’ 고 권고한다.


기업들의 높은 저축을 설명할 하나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란은행의 경우, 자원기업들이 이러한 불균형 현금비축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현물가 붐과 신규 광상의 불확실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저금리도 차입비용을 낮추고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에 소폭 기여했다. BCA 리서치에 따르면, (저금리는 현금보유를 덜 매력적인 옵션으로 만듦에도) 금융위기는 기업들을 더 겁먹게 만들었고 은행과 증시에 자금융통을 의존하기보다 자기자본만 믿게끔 했다는 것이다. 2008년 이후 제너럴 일렉트릭의 자기자본동원능력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에 기업은 직접 돈을 쌓기 시작했고, 3분기 마감 시점에서 S&P 500 기업 중 최대인 850억 달러가 되었다.


이 흐름이 반전될 가능성은 요원하다. 기업저축은 금융공황 이상의 깊은 원인인 현물 붐이나 금리 사이클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카고 대학 Loukas Karabarbounis과 Brent Neiman는 1975년에서 2007년 기간 동안 51개국에서 기업들의 사저축 비율이 총 20% 이상 상승했음을 집계했다. 기업 저축이 늘어나면서 GDP 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총 5%가량 감소했다. 





 이들은 기업 저축의 증가와 노동소득의 GDP 분율 감소를 1980년대에 시작한 투자자본가격의 하락과 연관짓고 있는데, 이러한 추이는 컴퓨팅 비용의 감소와 자본재생산의 저임금국가로의 이전을 그 원인으로 든다. 


어찌되었건 기업들은 노동을 더욱 자본재로 대체하면서 경제학 교과서적 원칙과 같은 대응을 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에 대한 금융은 유보금의 축적을 더욱 강화시켰다. (마치 가계가 매년 저축을 하면서 모기지도 늘리듯, 이것들이 기업이 차입을 줄일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았는데, 미국의 사업들은 어떤 방향으로는 차입 또한 늘려왔다)


 이들 연구진은 2007년 이후로는 주로 더 큰 4개국 경제에 집중하여 집계해왔는데, 사적 저축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잠시 주춤했지만, 절대값으로는 여전히 큼을 보였다. GDP 에서 노동소득으로 가는 비율은 여전히 낮았고, 저축의 필요성은 완화되었다. 자국시장에서 성장 전망이 낮았던 일본기업들은, 해외에서 거리를 늘려왔고, 지난 18개월 동안 더 높은 주가로 보상받았다고 JP Morgan Chase 의 Marc Jenner 는 말했다.


이런 허리 졸라매기가 당분간 반전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법인세율의 감소는 자본을 노동보다 더 매력적으로 만들 것이며, 높아지는 불확실성과 자금조달의 변덕스러움은 되풀이되며 기업들을 더욱 내부자본에 의지하도록 만들 것이다. 앞으로 2016년까지 GE 는 1천억 달러의 현금을 조성할 것이고 이는 투자와 인수합병 배당 그리고 자사주 매입을 하기에 충분한 액수이다. GE 가 축적현금을 인수합병에 사용할 것인가 라는 최근의 질문에 대해서, CEO 제프 이멜트는 “우리 주머니의 돈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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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역사는, 다른 것들 중에서도, 토지에 덜 얽매이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중농학파는 토지야말로 부의 보증이라 보았고, 애덤 스미스는 토지를 노동과 자본과 나란히 두어 생산을 만들어내는 3요소로 정리했다. 얼마 후 토마스 맬더스는 토지의 타고난 한계야말로 인구 증가가 맞닥뜨릴 재앙이라고 보았다.

 이런 재앙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서구 국가들은 토지 부족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어떤 것들은 독창적이었고 – 고층 건물, 인공 비료, 교외 지역 – 어떤 것들은 비도덕적 – 식민지 개척, 토지소유의 몰수 – 인 방식이었다. 발달한 교통수단은 더 먼 토지를 가깝게 이용할 수 있게 했고, 지구 반대편에서 곡물을 수확하거나 더 먼 교외 지역에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높은 생산성은 더 좁은 농장에서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GDP 대비 토지의 가치도 크게 하락했다. 20세기 후반 선진국 경지에서 토지는 충분히 주변화되어,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 않을 소재가 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부 미래학자들은 교통과 통신의 발전이, 토지와 입지의 중요성을 실제 삶에서 떨어뜨릴 것으로 교과서에 기재하고 믿곤 했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관심은 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문제는 토지 전체의 공급부족이 아니라, 특정 장소의 부족 – 세계경제의 불균형한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도시 공간의 부족이 핵심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장소에 대한 높은 토지가격은 성공에 수반되는 필연적인 결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러나 또한 세계경제에 가혹한 비용을 요구하는 왜곡의 산물이기도 했다. 혹자는 1960년 이후로 이 왜곡은 미국의 GDP 를 13% 이상 손상시켰다고 추산했다.




 Old kent road to mayfair

 토지의 새로운 위상은 두 가지의 발전에 근거한 것인데, 첫째는 역설적으로 1970년대 이후로 두드러지기 시작한, 컴퓨터와 통신의 발전이다. 어떤 면에서 이 혁명은 Frances Cairncross 가 전망했던 ‘거리의 종말’ 과 함께 온 것인데, 서플라이체인은 국경과 대양을 초월하여 소비자 서비스와 재화를 공급할 수 있게 된 현상과 함께한다. 거리는 죽었지만, 입지는 그러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선진국에서는 수많은 활기넘치던 대도시들이 축소되었다. 1980년대에 이중 일부는 부활하였는데, 하버드대의 Edward Glaeser 와 CREI의 Giacomo Ponzetto 는 이것이 수익성 좋은 지식집약적 산업의 성장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했다. 트레이더들은 더 많은 투자자를 통하여 더 많은 금액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세계시장을 통하여 더 많은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지식집약적 경제활동의 산물이 폭증하자,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장소의 가치도 그렇게 되었다.

 Lund 대학의 Thor Berger 와 옥스포드 대학의 Carl Benedikt Frey 또한 이 사상을 지지하는데, 1980년대 이전에는 도시 노동력의 숙련도와 새로운 종류의 직업을 창출해내는 역량간의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로 새로운 카테고리의 고숙련 직업군과 더 많은 수요들이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Mr Glaeser 연구진은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인구와 이 지역 내 노동자들 생산성의 강한 상관관계를 발견하였다. 아이디어 중심 산업이 자리잡은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더 지식을 더 빠르게 모으고 축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류 도시들은, 다른 도시들이 쉽게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혁신적 활동의 뜨거운 요람이 되었다. 무리를 이루어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고용 기회와 잠재적 소득을 북돋았고, 방갈로르에서 오스틴까지, 밀란에서 파리까지, 토지는 결과적으로 더욱 희소하고 귀중한 자원이 되었다. 그 결과; 켄터키 지역의 시골 토지 1헥타르의 잠재적 가치는 실리콘밸리 산타클라라 1헥타르의 가치에 비해 한없이 조그마해졌다.

 산타클라라 토지의 부활에는, 아직 더 지을 것이 많음에도 또다른 고통스러운 요소들이 뒤따랐는데 바로 증가하는 토지사용규제였다. 세계적 IT 기업들의 고향인 마운틴 뷰의 산타클라라 타운을 예로 들자면, 아직 시내 주택의 절반 가량이 1인 가구 건물들이고 인구밀도는 이제 제곱킬로미터당 2,300명을 갓 넘은 수준으로써, 딱히 엄청나게 밀집된 도시도 아닌 샌프란시스코의 1/3에 불과하다.

 이런 클러스터링이 지역경제에 일으키는 반향과 그 비용 – 이를테면 19세기의 붐비는 슬럼가들이 범죄와 전염병과 환경오염과 계층갈등의 온상이 되었던 - 을 고려해 보면 토지사용규제의 증가는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정부는 이러한 빌딩들에 새로운 규제를 적용하거나 연장하여 고도와 디자인을 제한하고 주차장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그린벨트를 강제하기도 했는데, 또한 이런 규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게 복제되었다.

 대도시경제가 20세기 이후 부활하면서 인구도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런던과 뉴욕의 중심부에 사는 인구가 이토록 많아진 시점은 없었다. 그렇게 주택 건축의 질에 대한 상승한 요구도 규제의 덤불과 부딪혀 예상치 못한 결과들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맬서스의 친구이자 또한 저명한 경제학자인 리카르도는, 이러한 희소자원의 소유자들이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하게 되는 지대추구경제들에 대한 예견을 했다. 곡물의 공급이 부족해지면 곡물가가 상승하고, 이는 지주들로 하여금 더 많은 토지를 경작하게 한다. 높은 식량가격은 모든 지주들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나 높은 생산성을 가진 땅을 깔고 앉은 군주는, 어떤 혁신이 없이도, 그가 어쩌다가 갖고 있던 자원을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게 된 고로 그의 소득이 갑작스럽게 뛰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도시들이 직면한 문제들이다.

 예일대학교 Robert Shiller 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에서 새로운 주택을 건설하는 비용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80년대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2000년대의 자산버블은 주택가격을 동기간 대비 30%이상,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60% 이상 밀어올렸다. 미국만이 아니라, 경제의 변화는 전 세계 모든 도시들을 부활시키고, 주택값을 뛰어올렸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에서, 주택 가격에는 어느 떄보다 거대한 부가 담겨 있다.





 Belleville to Rue de la Paix

 이 문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상승하는 집값은 상승하는 토지값의 산물로 본다. 일리노이 대학의 David Albouy와 미국 의회 예산국의 Gabriel Ehrlich 는 미국의 토지값이 총 주택가격의 1/3, 도심지에서는 절반에 달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주택가격에서 토지값이 차지하는 높은 비중은 필연적으로 토지보유자의 높은 지대地帶수익으로 이어진다.

 만일 고도와 밀도에 대한 법적 제한이 완화된다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땅의 규모는 감축될 수 있다. 이는 지주들에 의한 지대수익을 감소시키고 새로운 개발수요는 재빨리 충족될 수 있다. 마치 농업생산성의 향상이 농지보유자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감소시켰던 19~20세기의 흐름처럼, 개발 제한의 완화는 전체 경제에 있어 고정 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경제활동의 더 많은 소득이 노동자들과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

 건물 규제가 도시 지역의 생산성을 낮추고 비용은 비대하게 만드는데,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Mr Glaeser 와 Raven Saks,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Joseph Gyourko 는 공급을 제한하는 규제로 인한 자산 비용을 산출하는 시도를 하였는데, 이들이 '그림자 세금 shadow tax'이라 명명한 이 비용은 1998년 워싱턴과 보스턴에서는 20%, 샌프란시스코와 맨하탄에서는 무려 50%에 달했다. 그리고 사정은 그 후로 명백히 더 나빠졌다.
 런던경제대학의 Paul Cheshire 와 Christian Hilber 팀 또한 비슷한 추산을 시도했는데, 2000년대 초반 이 '그림자 세금'의 규모는 밀라노와 파리에서는 무려 300%, 런던에서는 450%, 특히 런던 서부지구에서는 무려 800%에 달했다. 유럽의 경제적 중심지 상업부동산의 가치를 차지하는 가장 큰 몫은 새 건물을 짓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런던 메이페어 지구 (동부 고급주택가) 조차도 높은 임대료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터인데, 그러나 이런 효과들은 부자들보다는 빈자들에게 더 타격을 입힌다. 미국의 주택보유자로 말할 것 같으면, 가구들의 60%가량은 중산층의 대부분이 주택가격상승으로 인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뉴욕 대학교 Edward Wolff 는 이 부의 효과가, 모기지 채무의 동반상승으로 인해서 실제로는 훨씬 줄어든 데에다가, 주택을 임대한 세입자들에게는 높은 생활고를 안겨주었다고 지적한다.
 베스트셀러이기도 한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파리 경제대학 Thomas Piketty는 주택의 부가 불평등 심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MIT의 Matthew Rognlie 또한 국가 소득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아닌 자본소유자로 몰리고 이 흐름이 더 커지는 현상이 바로 높은 주택가격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1950년 주택가격으로 인한 자본소득은 GDP 의 3%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를 넘어서고 있다.

 토지임대는 지주들에 의해 신흥경제 또한 장악하고 있다. 자산관리기업 CBRE 는 베이징과 뉴델리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오피스 시장 중 하나이고, 쿠알라룸푸르와 자카르타는 가장 빠르게 상업용부동산가격이 등귀하고 있다고 말한다. 토지가격의 극단적 상승은 성장하는 경제에 치명적인데, 특히 잘못 규제된 자산시장은 더 많은 피해를 의미한다. 인도의 대도시는 짐덩어리인 규제와 빡빡한 임대료 제한, 그리고 복잡한 토지용도규제가 경제성장의 패턴과 과실의 분배를 왜곡하고 있다. 지대의 상승은 또한 자산보유자로 하여금 부패와 자원의 낭비를 하는 유인을 제공한다. 지주들은 개발제한규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설정하도록 정치인들에게 현금을 제공하고 횡재를 노리게 마련이다. 2014년 10월 인디아타임스는 뭄바이 중심부에 개발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제공해야 하는 뇌물의 액수가 건축비의 절반에 달한다고 고발한 바 있다.

 토지의 부활이 보여주는 가장 추한 일면은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브레이크가 될 수 있다. 경제가 노동자를 생산적으로 일하게 하고 그리하여 부유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사람과 자원을 낮은 생산성의 세그먼트에서 효율적인 위치로 재조정하는 것이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이는 좀비 기업이 사업을 접고 좋은 기업이 크게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동하는데, 높은 생산성을 낼 수 있는 노동자들의 부족은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유혹하도록 하게 되고, 그 결과 모여든 유능한 노동자들과 기업의 클러스터는 높은 임금과 생산성으로 인해서 경제 전체의 헤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Mediterranean Avenue to Boardwalk

 그러나 이런 성장의 흐름은 많은 경제권에서 부러지고 있다. 노동자가 높은 임금을 좇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려면 일단 지역 노동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집을 구해야 한다. 가까운 집을 구하기 위한 입찰경쟁은 제한된 주거공간을 꽉 채울 때까지 밀어올려지고, 유능한 노동자들을 끌어오기 위한 신호가 되어야 할 임금들은 임대업자들의 호주머니로 흘러들어가면서 이 불공정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저항을 촉발시켰다. 많은 노동자들이 (비효율적으로) 저임금 일자리를 감수하곤 하는 까닭은, 그런 직장밖에 없지만 집값이 저렴한 지역에 머무르는 게 그나마 나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는 손상된다.

 Chicago Booth School of Business 대학의 Chang-Tai Hsieh와 UC버클리의 Enrico Moretti는 이러한 비용에 대해서,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의 까다로운 건축규제가 없었더라면 총 고용은 5배까지도 증가할 것이라고 추산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제손실은 1964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의 총 GDP 를 대략 13.5% 낮추었을 것이라고도 보았다. 현 경제규모와 대비하면 이 액수는 연간 총 2조 달러, 인당 1만불에 달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세계의 도심부족 문제는 거의 인공적인 문제라는 점인데, 힘든 점은 그게 해결이 쉬운 문제는 또 아니라는 점이다. 까다로운 토지 규제는 가장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민감한 이슈이다. 또한 그것은, 상업과 이민 관련한 것들 처럼 유해한 이슈이기도 하다. 새로운 재화와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회는 결국 이익을 보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경쟁을 통해 일부의 비즈니스를 밀어내고 문화적 변화는 불균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피해는 반대세력을 규합하고, 그렇게 토지가 이익을 본다.

 이는 결국 정책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정부는, 자유시장경제로 인한 이해를 보전하듯 밀집적 개발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도록 특정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새로운 개발로 확충한 세수를 개발반대운동과 협상하는 데 지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아니면, 리카르도의 후계자인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제안인 '토지가치세'를 고려해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세금은 이윤에 대한 유인을 변경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왜곡시키고는 하는데, 토지세는 토지의 공급을 감쇄시킬 수 없을 뿐더러 토지가 비생산적으로 사용되는 행위에 과세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촉진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제표준이 항상 거기 있기 때문에 - 도시의 입지를 룩셈부르크로 옮길 수는 없으므로.

 뉴욕 시장인 Bill de Blasio는 도시의 빈 로트에 시세별로 과세함으로써 브롱크스와 주변부의 활용을 망치는 구역의 거래를 활성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들이 있는데, 단단하게 연결되고 조직된 부자들을 건드려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른바 재정순수주의자로 불리는 에스토니아는 1993년 토지세를 도입하였으나 이는 여러 단계의 밴드로 나뉘어진 복잡하며 약한 세제이며 또한 주택보유자에 대해서도 공제하고 있다.

 이미 부유함의 축복을 받은 자산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또 다른 접근도 방해하곤 하는데, 더 빠르고 많은 수용량을 가진 교통망의 연결을 통한 도시의 확장이 그것이다. 교통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정책들 - 교통혼잡세라거나 - 은 저렴한데 비해, 대도시에서의 새로운 인프라는 느리고 비싸다. 런던의 새로운 지하철 라인 - Crossrail - 은 이미 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프로젝트가 되어 있다.

 제트팩이 없는 한, 기술이 어떤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는 거리의 포학을 극복할 만한 기술이 등장하여 이 모든 문제들을 걷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과 소셜네트워크는 인접성이 없이도 고밀도의 이득을 결합할 수 있다. 그러나 리카르도에 있어서도, 결국 고층빌딩과 지하철 이상이긴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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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일하는 방, 그리고 잠자리이기도 한 방에서 아내가 먹고 마시고 요리하고 세탁과 다림질을 비롯한 여러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것보다 부부 모두에게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1820년대, 당시 영국의 지도적 사상가이자 정치적 활동가였던 프랜시스 플레이스와 윌리엄 코벳은, ‘독립’ 가옥의 장점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덕분에 아내는 방을 더 잘 정돈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도덕적인 면에서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 아이를 돌보는 것도 전처럼 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방에 불을 피우고 요리라든가 설거지, 청소, 세탁, 다림질을 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이는 단지 여성에게 가사일만을 요구하는 구태적 성역할의 배분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바로 여성 노동 과정의 ‘은폐’ 이다. 복음주의와 산업혁명의 결합, 그리고 ‘방’을 갖춘 가옥의 보급으로 프라이버시가 자리잡고 가족이 하나의 경제단위로 성장하면서, 가사노동은 아내의 것임과 동시에 숨겨야만 하는 노동의 절차가 되었다. 힘들게 일하고, 혹은 바깥에서 위대한 일에 종사하고 돌아온 가장을 위해서, 가정은 완전히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물이 길어져 있고, 화덕에는 연료가 채워져 있고, 집 안은 정리되고 청소되어 있고, 시트 식탁보 의복 등은 말끔하게 세탁, 개조, 수선되어 있어야 했다. 가장이 먼 곳으로 일하러 떠날 때에는 아침 일찍 도시락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으며, 이 지출들을, 가장이 주는 빠듯한 월급 내에서 해결되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절차들은, 이러한 노동들을 하다 보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때와 먼지로 찌든 상태로 아내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아내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가장의 눈에 띄지 않게 가사를 처리하고 요리를 내놓으며 그릇을 닦고 아이를 키워낸 다음에, 말끔하고 정숙하나 또한 성적으로 요염하게 준비된 상태여야 했다. 근대 이후 가사 공간의 ‘분리’는, 이런 함의를 또한 의도하여 설계되었고 덕분에 가장은 자신의 가장 친밀한 가족이자 동료가 지저분하고 끊임없는 노동을 ‘격리’함으로써 더욱 편안히 외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 장기 불황의 초입에 접어든 한국에는, 구태적 성역할의 조정에 대한 여론의 강한 요구와 함께 ‘집에서 요리하는 남성’ 에 대한 선호와 성적 코드가 새로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잡지에서는, <남자들의 항변:요리 좀 못하면 안됩니까> 라는 제목 하에 이러한 내용의 아티클이 게재되었다.

 "요리가 뭔데? 요리프로그램에 대한 최근의 관심. 그걸 반영하는 기사들을 보면 남자들이 정육점 고깃덩어리처럼 줄지어 걸려 있는 것 같다. 어떤 놈이 신선한지 여자들이 팔짱 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앞치마 두르고 부엌을 분주히 돌아다녀야 남자구실을 한다는 거지. 이것도 차별 아닌가?"



 직접 식재료를 준비하고 메뉴를 고르고 채소를 다듬고 불을 조절하며 다양한 양념과 맛의 향연을 보여주는, ‘남자의 요리’. 그것은 심지어는 과거 여자의 몫이었던, 너무나도 당연했으면서도 독립된 공간으로 은폐되기까지 했던, 음식 준비의 과정이, 더 많은 헤게모니를 쥔, 남성들의 손을 거치면서, 미디어의 세트와 무대 조명을 받는 ‘공연’으로 재탄생했다. 요리하는 남자는 숨지 않는다. 재와 먼지와 피곤에 찌들어 있지도 않는다. 드라마 ‘한니발’의 메즈 미켈슨과 ‘삼시세끼’ 차승원, 그리고 ‘집밥’ 백종원은, ‘여자들의 일’을 하는 것이 나의 남성성을 털끝만큼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탄탄한 근육과 체격으로 내보이며 맛과 향내의 콘서트를 펼친다.

 이러한 스펙터클이, 성적으로 매력을 뽐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수많은 여성들은 요리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와, ‘차줌마’와, 그리고 ‘백선생’ 의 새로운 섹시함에 환호했고,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지만, 뒤에서 다가가 끌어안고 바지를 내리고 싶을 지경이다!’ 고 외치기 시작했다. 남성의 가사 노동과 여성의 욕망, 어느 것도 숨기는 건 없다. 그래서인가? 구태적 성역할이 흔들리고 세상의 지형이 진화의 무대로 헤쳐모이기 시작하자, 과거의 서열에 익숙해진 채, 어느새 자신들이 새로이 바뀐 레이스의 한참 뒤에 내팽겨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일군의 무리들이 볼멘 소리를 내뱉는다. “이것도 차별 아닌가?” 아무도 귀기울여줄 필요가 없는 이런 구시대적 항변은, 음식물 쓰레기 통에 좀 숨겨놓는 게 어떤가.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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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hat comes down doesn’t go up



 선진국 정치계에서, 새로운 적은 바로 경제가 되었다. 지난 7여년 간, 허술한 규제들을 농락하던 부도덕한 은행가들이 악당이었다면, 이제는 끔찍한 보수에 고통받는 정직한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인색한 보스들이 주적으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강한 조합의 권리를, 많은 이익을 거두지만 적은 보수를 주는 식음료업계를 상대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CEO 들이 평균적 노동자들보다 300배나 많은 보수를 받는다는 사실을 규탄하며 “everyday Americans” 캠페인을 시작했다. 영국의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번드는 유권자들이 '포식자' 자본주의자들을 심판할 것을 요청했으며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총리는 자신들이 '일하는 사람들의 당' 이라고 반박했다. 일본 신조 아베 총리는 기업가들로 하여금 임금을 인상할 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런 레토릭들은 분명한 공명이 있었다. 전 세계 대부분에서 금융공황은 임금에 지독한 악영향을 끼쳤다. 지난 5년간의 경기 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에서 실질 임금은 2009년 대비 오히려 1.2% 하락했다. 영국에서도 실질임금은 2009년부터 2014년 기간 매년 하락하여 1900년대 중반 이후로 가장 긴 침체를 기록했다. 2014년 노동소득의 중간값은 2008년의 10%나 떨어졌다. 유로존의 위기에서 유일하게 선방한 독일에서도 임금은 2008년 대비 2.4% 하락했다. 유이한 예외가 바로 캐나다와 프랑스였지만 임금소득이 매우 부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Sin of wages


 정체 혹은 하락하는 임금소득은 단지 고통받는 가구나,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다. 노동자는 또한 소비자이기도 하다. G7 국가들에서 가구소비는 GDP 의 55% (프랑스) 에서 68% (미국) 에 달한다. 만약 모든 개인기업가들이 임금을 깎는다면 저임금은 필연적으로 경기 전반을 압박할 것이고, 가계는 부채에 시달리거나 지속가능하지 않은 지출구조에 처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것인데, 불황기 이전에도, 임금은 생산성을 제대로 따라간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제 2차대전 직후 1960년때까지는 둘이 함께 상승 (51%)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둘은 분리되기 시작하여, 생산성이 220% 증가하는 동안 실질 임금은 100% 이하로 증가했다. 그 결과는 GDP 에서 노동자의 몫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나머지는 최고 수준의 급여를 받는 층에 더 쏠리기 시작했고, 문제를 악화시켰다. 


학자들은 이러한 노동소득 지분의 저하를 몇몇 큰 요소들에서 찾기 시작했다. 하나는 자본소득 - 특히 주택임대 - 이 노동소득을 앞지르기 시작한 점이다. 또 다른 요인은 자본재가 더 저렴해지고 나아지기 시작한 추세이다. 기업가들은 노동자 대신 더 생산성 있고 저렴한 기계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동수요와 임금압력을 낮추었다. 세계화 또한 선진국들의 노동수요를 감소시켰다. 에딘버러 대학의 Michael Elsby와 연방준비위원회의 Bart Hobijn and Aysegul Sahin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993년에서 2010년 간에 수입이 공급체인을 많이 대체한 산업일수록 노동자들의 지분이 가장 많이 낮아졌다. 노동조합의 감소도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 1960년 이후 미국 노동조합의 힘은 매년 감소해왔으며 이는 G7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황 이후 임금소득 성장의 부진을 불러온 숨은 요인은 좀 더 복잡한데, 과거의 경제학자들은 이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실업'으로 보았다. 실업이 일단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괜찮은 인력을 구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구인시장은 달아오르며, 결국 새로운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을 것이라는 가정이 일반적이었다. 실업률은 보통 낮고, 임금상승압력이 인플레이션을 주도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물가안정실업률 NAIRU 을 계산하는 일이, 중앙은행들의 주 역할 중 하나였다. 


 

Matching quandaries


 대침체 이후로, NAIRU 는 종종 상승했다. 실업의 시기는 활기의 손상으로부터 장기적 침체로 이끄는 영향을 미쳤다. 직장에서 떨어져 있는 기간은 기술의 쇠퇴와 시장에서의 필요와의 미스매치로 이어졌다. 경기회복기의 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산업의 중심부로부터 슬럼프 시기에 해고된 사람들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이렇기 때문에 일단 해고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다시 직장에 복귀하기 어렵게 되었음을 깨닫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연금수령연령까지도 비고용상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게 되고, 결국 그들의 지속적인 비고용상태는 임금을 끌어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불황 이후 NAIRU 는 상승했고, 인플레이션은 곧 뒤따를 것이었다.


현재의 침체에 뒤이어, 여러 경험칙들이 많은 나라들에서 뒤집혀갔다. 2013년 OECD는, 영국에서 실업률이 6.9% 이하로 유지된다면 임금 주도 인플레이션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2014년 실질임금은 오히려 0.6% 하락했다. 2013년 연방준비위원회의 경제학자들은 안정적인 고용이 0.3%의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실업률이 2% 하락했음에도 임금의 중간값은 그 이상 하락했다. 일본에서 2014년 실업률은 공황 이전 수준인 3.6%를 회복했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2.5% 하락했다.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지만, 그것이 일시적이라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다. 실질임금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근거들도 있다. 지난 2월 독일 최대 노조인 IG Metall은 현재 인플레이션 0.3%를 뛰어넘는 3.4%의 임금인상을 합의했다. 영국의 최근 데이터는, 인플레이션율이 사실상 제로에 가까움에도 평균 월급이 1.7% 상승했다는 자료가 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는데, 임금 충돌에 대한 최근의 힌트는 예상치 못한 저인플레이션의 인공적 창조물이다. 미국과 영국의 평균 임금 데이터는, 수요가 많은 중위 노동자의 고통을 감추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이 침체가 노동시장에 남긴 손상 - 숙련의 손실과, 산업 수요/경력의 불일치 - 이 장기간의 비고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징후일 수 있다. 이 가정대로라면 저임금은 더욱 고정되고,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은 저실업률 상황에서도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그 노동시장 전환은, 인플레이션율을 견제하고자 하는 중앙은행에게는 새로운 도전일 것이며, 또한 저임금의 정치가 등장해야 할 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냈는가. 하나의 유력한 트렌드는, 임금을 올리지 않고도 포스트를 쉽게 채우곤 하는, 비정규직 고용의 증가이다. 독일에서 400유로 미만의 월급을 받는 '미니 잡'이 급증했고, 영국에서는 근무 시간을 특정하지 않는 'zero hour' 계약이 유행하고 있다. 해고를 쉽게 만든 사회 구조는 고용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대신 노동자의 위치를 취약하게 만들고 협상력을 깎아내리고 있다. 







Not for the long haul


 "staffing industry" 인력고용 혹은 파견 산업도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 1960년 최초로 사무직 노동자를 대행 고용 및 파견하는 기업이 창업하면서 생겨난 이 인력 파견의 영향은 보이는 것보다 더 중대하고 컸다. 오늘날 Kelly Services, Adecco and Randstad 등의 파견 고용 기업은 경량 제조업체와 공장들에 노동자를 공급한다. 2013년 Kelly Services 는 75만명을 '공급'하여 월마트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고용을 하는 사기업이 되었고, 미국 고용의 2%를 차지하는 290만 비정규직 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비정규직은 G7 에 범람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른바 종신고용 shûshin koyô 이 일단 종료된 이후로 임시적 고용이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2014년, 일본 최대의 채용 에이전시인 Recruit 그룹은, 도쿄 증시에 190억 달러의 가치를 기록했다. 영국에서는 올림픽도 경비에서부터 (G4S) 음식까지 (Compass) 거의 모든 진행과 물품들이 비정규직 파견 업체들을 통해 제공되었다.

 구인기업과 구직자를 충분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최적 매치를 이루어내면 양 측 모두에게 유연성을 제공하고 저실업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2010년 노벨상을 받기도 한 연구 결과는 분명 어느 정도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구직 경쟁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 많은 임금을 주어야 할 인센티브는 매우 낮아졌고, 결국 노동자 파견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크게 낮추었음을 2014년 Rebecca Smith and Claire McKenna의 연구가 보였다. 

 G7 국가들은 대체로 세 가지 방향으로 이런 저임금의 압력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고 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덜 시도되는 방안은 고용유연화를 재규제하는 방안으로, 특히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미니잡'을 고임금 직장을 없애는 원인으로 지목하며 가장 비판적이다. 이는 사실과 다른데, IAB 의 조사에 따르면 미니잡은 풀타임 정규직이 강한 곳에서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제로아워 컨트랙트를 금지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Credit where it’s due

 이런 추진들이 노동자들의 형편을 낫게 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하나는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양방향 유연 임시직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비정규직은 어린아이를 둔 여성과 연금이 충분하지 않은 노인들에게 인기가 좋다. 시장이 덜 유연해질수록 경기하강기에 대량해고의 위험은 높아진다. G7 국가 중 가장 노동유연성이 낮은 프랑스는 10%대에 달하는 실업률을 기록중이다. 2010년부터 프랑스 경제는 14만 개의 새 포스트를 만들어냈는데 이보다 훨씬 유연한 영국 경제는 동기간 160만개의 실적을 달성했다. 정치인들의 노력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임금 직종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가혹한 진실이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세금 공제이다. 2010년 영국에서 최저임금 (시간당 5.93파운드) 을 받는 노동자는 그 해 소득 12,300만 파운드 중 5,900파운드에 대해서만 납세 의무를 진다. 오늘날 이 선은 13,520 파운드로 상향되었는데 납세구간은 2,920파운드로 하향조정되었다.
 이러한 보상세제의 문제는 타겟팅과 잘못된 보상에 있다. 저소득층에 대한 세금 '크레딧'은, 특히 고용주에게, 임금을 낮게 유지할 보상으로 작동한다. 

 물론, 인색한 고용주들이 임금을 인상하는 대신 세금환급에 의존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맥도날드, 버거킹, 웬디스에서 버거를 굽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상당한 세금환급을 받는다. 이 세제혜택은 결국 이 기업들의 주주들에게도 이익이 되었고, 다른 회사들은 더 높은 임금도 지불할 여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월마트는 270억 달러의 순익과 60억 달러의 배당을 지불한 후에도 최저임금을 7.25달러에서 9달러로 올리기로 하였고, 영국의 연구들은 임금인상이 노동자들을 머무르게 하는데 도움이 됨을 밝혀냈다. 

 타겟팅된 세금환급이 전면적인 부가비용의 삭감보다 저렴했다 - 영국 재무부는 2013년 14년 기간 300억 파운드를 지출했다 - 10년 전 대비 2배 이상이 지불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과 CLR 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은 009년부터 2011년까지 연간 연방 예산의 6%가량인 2270억 달러를 저임금 노동자 보조에 사용했는데 이들 중 주 구성 요소는 구매력을 직접적으로 올리기 위한 세금 환급 (670억 달러) 과 푸드스탬프 (710억 달러) 으로 지불되었다. 또다른 큰 지출항목인 메디케이드 (830억 달러) 는 고용 기업들의 의료보험 부담 비용을 절감시켰고 2003년부터 2013년 기간 동안 커버리지는 67%에서 59%로 감소했다. 

 세 번째 방법인 최저 임금의 인상은 부담을 다시 기업에게로 되돌리는 길이다. 이 선은 G7 국가별로 다른데 이탈리아에서는 제한이 없고, 프랑스는 9.61유로로 최고 수준이다.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대략 40%가량 인상한 $10.1 목표를 제시했고, 영국에서는 SNP 가 8.7유로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싱크탱크 생계임금연구소는 최저임금이 런던에서는 9.15유로 그 외 지역에서는 7.85유로는 되어야 한다는 결과를 제시했으며 이는 현 수준보다 41% 높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격에 바닥과 천장을 규정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른다. 에너지 단가 캡은 에너지 기업들의 추가 투자를 저해하며 최저임금선의 인상은, 프랑스가 보여주듯, 고용을 줄이게 된다. 그러나, 영국의 2009년 이후 경기침체시기 분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최저임금의 완만한 인상은 실업을 악화시키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저임금바닥설정에 대한 권한을 가진 미국의 대도시들은 종종 연방기준 최저빈곤선 이상의 최저임금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의 연구들 또한 이러한 높은 수준의 최저임금이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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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저임금 직종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없느니만 못한 직장은 분명 (적지 않게) 존재한다. 반사회적, 폭력적 직업 그리고 인적자원에 손해를 끼치는 유해하거나 위험한 직종들인데,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그걸 인력으로 갈아엎고 메꾸는 '일자리를 창출' 해 냈고, 좀 더 과거로 올라가면 런던 페스트도 수십만의 검시관 / 시체처리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고 디킨스는 적고 있다. 이게 '없는 것보다는 나은 일자리' 는 아닌 것이다. 


 이 기사에서 이코노미스트는 또한, 노동은 빈곤을 벗어나는 길이 되어야지 빈곤에 갇힌 채 머물러선 안 된다고 하면서 (여기까지는 지극히 옳다!) 도 정치가 저임금을 규제하는 데 개입하는 과정에서 경제 성장의 동력을 꺼트릴 정도로 위험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임금 인상이 주가를 올리고 보드 멤버에게 엄청난 사이닝 보너스를 지급하고 회사채를 상환하고 세금을 지급한 다음에도 향후년도 실적전망이 튼튼할 것임을 수 년 이상 확신한 다음에야 가장 나중에 마지 못해 수혜처럼 말석을 내주는 원칙이 그것인가? 양차대전 이후 전 세계적 경제 성장이 어디에 흘러가고 어디에 귀착되며 누구에게 유통되는가에 대해서는 이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번 돈이란 언제는 쓰일 것이고, 결국 언제 누군가에게 쓰이느냐의 문제이다. 그게 경제성장의 이유 아니겠는가.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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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제국주의론은 주로 평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이며 공산주의 선전의 상투 수단이 되어 왔다. 이는 미국 상원을 대신해 1934~1936년 재정적 산업적 이해관계가 미국의 제 1차 세계대전 개입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조사한 나이 위원회 Nye Committee 의 공식 철학이기도 하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가 매우 많은 관심을 끌었기에 악마 제국주의론은 한동안 미국에서 외교 문제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설명이었다. 이 이론이 단순하다는 사실도 그 인기에 기여했다. 전쟁 물자 생산자 (군수품 제조업자) 국제적 금융가(월가) 등과 같이 전쟁에서 명백히 이득을 보는 몇몇 그룹을 동일한 종류로 묶고 있다. 이리하여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충동질하고 계획하는 '전쟁상인' 즉 '악마' 가 되는 것이다

극단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주의를 제국주의와 동일시하고, 온건파 마르크스주의자와 홉슨의 후계자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운영상 잘못이라고 보는 데 반해, 악마 이론에 집착하는 사람은 제국주의와 전쟁을 모두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한 사악한 자본주의자의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고 파악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몇몇 전쟁이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주로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일어났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1899~1902년의 보어 전쟁과 1932~1935년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 일어났던 차코 전쟁 등이 고전적 사례다. 금광에 대한 영국의 이해관계가 보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혹자는 차코 전쟁을 유전 지배권을 놓고 두 석유 회사가 벌인 전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숙한 시기에 이른 뒤에는 보어 전쟁을 예외로 한다면 전적으로 혹은 주로 경제적 목적 때문에 강대국이 전쟁을 벌인 적은 없었다. 예를 들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의 경우 중요한 경제적 동기가 없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독일 연방 내부에서 프로이센에 유리하도록, 나중에는 유럽 국가 체제 내에서 독일에 유리하도록 권력 분포를 새로이 확립하려는 목적에서 발발한 전쟁이었으며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1854~56년의 크림 전쟁, 1898년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 1904~5년 러일 전쟁, 1911~12년의 이탈리아-터키 전쟁 그리고 몇몇 발칸 반도에서의 전쟁을 살펴보면 경제적 목적은 있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양차 세계대전은 분명 정치 전쟁이었으며, 전 세계의 제패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럽의 제패를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 이익과 손실은 승리와 패배라는 정치적인 결과에 따르는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경제이론적 제국주의론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와 꽤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기간 동안, 즉 자본주의 시대에도 경험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경제이론적으로 제국주의와 동일시되곤 했던 식민지 팽창기는 자본주의가 성숙되기 이전이었으며, 따라서 붕괴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또한 16세기에서 18세기의 시기와 비교할 때 19세기와 20세기의 식민지 획득은 양적으로 훨씬 적다.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를 맞아 자본주의는 오히려 제국의 대규모 해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물러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 단계 이전에 이미 제국이 건설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경제이론적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할 역사적 증거는 부족하다.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정책은 정치적 의미에서 제국주의였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이나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책들 역시 제국주의였다. 7세기와 8세기 아라비아의 팽창은 제국주의의 전형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제 1차 십자군의 결성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는데 그것은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 즐겨 사용하던 전형적인 논거였다.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으로 막혀 있으니 많은 인구에 비해 너무나 협소하다. 주위에 부가 넘치는 것도 아니고 농민이 살기에도 벅찬 양식만이 나올 뿐이니… 따라서 그대들은 서로 죽이고 멸망시키며 전쟁을 일으킬 것이요, 바로 그대들 중 많은 이가 상호간의 싸움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루이 14세, 표트르 대제, 그리고 나폴레옹 등은 모두 근대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위대한 제국주의자였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모든 이런 제국주의 현상은 자본주의 시대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미 확립된 권력관계를 전복하고 그 대신 제국주의 세력의 우월한 지배를 확립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이 두 시기의 제국주의는 경제적 목적을 정치적 고려에 부차적으로 종속시키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폴레옹은 개인적 이득을 얻기 위해, 혹은 경제체제의 조절 불량을 피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시작했던 것이 아니다. 이는 히틀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산업계의 총수가 기업에 기업을 추가하고 확장해 마침내 자기가 그 산업 전체를 독점적으로 혹은 준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될 때까지 산업'제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똑같은 목표였다. 자본주의 이전 단계의 제국주의자, 자본주의 시대의 제국주의자 그리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자가 원했던 것은 권력이었지 경제적 이득이 아니었다.

악마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자는 제국주의 정책을 부추기는 수단의 하나로 정부를 이용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경제적 해석을 뒷받침한다고 인용된 역사적 사례를 자세히 조사해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관계가 성립한다. 제국주의 정책은 보통 이들 정책을 지지해주도록 자본가를 소집한 정부가 제창한다. 슘페터 교수의 말을 빌려보자면 "자본가가 국제정치를 지배한다는 얘기는 신문에나 실리는, 사실과는 어이없게 딴판인 동화 같은 얘기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자본가는 전쟁을 부추기기는커녕 제국주의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예도 드물었다. 전통적으로 제국주의와 같이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정책에 상인과 제조업자는 극력 반대해왔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제이콥 바이너 Jacob Viner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평화주의, 국제주의, 국제적 화해 그리고 분쟁의 타협, 군비 축소를 지지했던 사람은 대부분 중산계층이었다. 팽창주의자요 제국주의자이며 주전론자였던 사람은 대부분이 귀족과 농민 그리고 더러는 도시의 근로자 계층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 보어 전쟁 기간에, 또 히틀러의 등장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영국 의회에서 유화정책을 내세웠던 사람은 모두가 부유한 계층, 한창 세력이 커가던 북부 공업지대의 중산계층과 런던의 '도시'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자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미국 혁명, 1812년의 전쟁, 1898년의 제국주의, 진주만 기습 사건 이전 루스벨트 행정부 시절의 반나치 정책 등을 반대하던 주류 세력은 주로 상공업계였다. 1876년 9월 26일 솔즈베리에게 보낸 디즈데일리의 글에서는 "모든 나라의 돈 많은 상인 계층은 전쟁을 반대하고 있다" 라고 쓰고 있다. 독일 주재 영국 대사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하루 전인 1914년 6월 30일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는 "상공인 계급이 어떤 형태든 전쟁은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모두에게서 듣고 있다" 는 내용이 있다.

   

18세기 초 <스펙테이터 Spectator> 지의 앤드루 프리포트 Andrew Freeport 에서부터 노먼 에인절 Norman Angell의 저서 <위대한 환상 Great Illusion> 에 이르기까지 '전쟁으로 이익 볼 것은 없다. 산업사회와 전쟁은 상호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보다 평화가 필요하다' 는 것은 계급으로서의 자본가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자본가 대부분의 확신이었다. 자본가의 행동에 바탕이 되는 합리적 계산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로지 평화뿐이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자본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비합리적 요소와 혼란이 따른다. 제국주의는 기존 권력관계를 전복하려는 노력인 까닭에 불가피하게 전쟁이라는 위험을 수반한다.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일반적인 번영과 평화를 기대했다. 자본주의 비판자는 번영과 평화가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과 폐지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양쪽 진영 모두가 정치 문제를 경제적 처방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벤담은 전쟁을 유발하는 제국주의적 분쟁을 없애는 방법으로 식민지 해방을 주장했다. 프루동과 코브던은 관세를 국제 분쟁의 유일한 원인으로 보고 자유무역의 확대에 평화가 있을 것으로 파악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기업인의 행위를 결정한다고 생각되던 경제적 요인이 모든 사람의 행동을 이끈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해석이 쉽게 받아들여진 또 다른 이유는 이 이론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데 있다. 슘페터가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던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일련의 핵심적 사실이 이미 완벽하게 설명된 듯하다. 국제정치의 모든 미궁이 단 한 번의 권위 있는 분석으로 깨끗이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즉 제국주의와 같은 그토록 위협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전인했던 역사적 세력의 비밀, 그것을 국제정치의 특수한 형태로 규정하는 이론적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특정 상황에서 구별해내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실제적 어려움과 같은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고유한 경향, 혹은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라고 단순화되었던 것이다.

   


                   - Hans. J. Morgenthau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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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중국 군사재판부는 중국인들을 생매장한 혐의로 기소된 일본군 요네무리 하루키와 고문, 강간, 약탈의 혐의로 기소된 시모토 지로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6개월 뒤 이들은 상하이 남경로에 내몰려 끌려다니다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 이것이 일본 전범에 대한 첫 공식 처형이었다. 상하이 주재 영국 총영사 A.G.N.오그든은 난징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 공개 처형이 잔혹하고 후진적이라고 지적하며 상하이의 외국신문들이 "중국 당국이 아직도 그런 (공개처형) 절차를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고 비난한 사실도 보고했다. 또 중국이 적들을 다루는 과정이 '이중잣대' 적이라고도 비판하였다. "중국 당국이 일본인 전범들과 중국인 '변절자들' 을 대하는 무자비한 태도와, 이곳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독일인들을 대하는 느긋한 모습을 비교하면 아주 재미있다. 독일인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함께 갈 수 없는 처지이지만 전후 협상에서 그들의 존재가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해 추방하지 않은 것이다"


오그든의 보고서는 런던으로 보내졌다. 외무부 전쟁범죄국의 프레더릭 가너가 이를 두고 중국의 행동을 비판하는 오그든의 태도에 이종차별적인 저의가 있음을 간파한 듯 날카롭게 반박했다.

"사실 중국은 일본 전범들에게 아주 온건한 편이었다. 그들이 저지를 엄청난 범죄에 비하면 처형자의 수는 지극히 적다. 중국은 많은 사람을 몰래 처형하기보다, 몇몇 극악한 범죄자를 대중 앞에서 단죄함으로써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것이 유럽의 많은 나라보다 더 혐오스러운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그들이 더 훌륭하게 처신했다고 본다. UN 전쟁범죄위원회의 태평양 소위원회는 이미 3월에 활동을 종료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그 모체를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중국이 이용가치가 있는 독일인들을 자신의 나라에 머물게 하는 것을 비난한다면, 미국에 있는 독일의 로켓 과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그 사이 연합국은 도쿄에서 일본 전범 중 정치와 군사 쪽 고위 관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큰 전후재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중잣대의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1946년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 그리고 비인도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소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Far East 가 설치되었다. 법정의 설치강령, 임명권, 기소권은 모두 미국의 손에 있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점령군 사령부가 관장했다. 판사석은 연합국측 11개국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소련, 중국, 인도, 네덜란드, 필리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이 선임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법관 윌리엄 웹 경이 재판장을 맡았고 소추위원회는 미국인 변호사 조지프 키넌이 이끌었다. 도쿄 법정도 뉘른베르크처럼 죄인들을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법과 평화를 앙양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 교훈을 남기고, 일본인들의 눈앞에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맥아더는 특히 일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공개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도쿄 지역 신문 발행인들에게 "전면을 할애해서라도 재판을 심층취재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이 대개 타블로이드 판 한 장 분량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판사들은 거대한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청객들이 "얼핏 보기에도 너무 높아 보였다" 고 할 정도였다. 모두가 정치적 배려에 따라 그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었는데, 캐나다 판사는 워싱턴과 오타와 간에 다른 전범재판을 놓고 이루어진 거래의 덕을 입었다. 인도 판사는 영국측에서 프랑스나 네덜란드보다 인도가 더 고통을 받았다고 고집한 바람에 결정된 경우였다. 영국이 인도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건네준 선물이었던 셈이다. 필리핀 판사는 자기네 나라도 인도만큼이나 고통받았다고 주장해 자리를 챙겼다.

피고측 변호인단(28명의 일본인 변호사와 2명의 미국인 변호사)은 곧 판사들의 신뢰성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미국인 변호사 조지 퍼네스는 "이 판사들은 일본을 패망시키고 재판에 회부한 당사국들의 대표이므로 피고들에게 적법하고 공정한 재판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고 주장했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과학자들이 화성에 갈 수 있는 우주선을 완성하고, 그곳에서 중립적인 나라와 국민들을 찾아내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재판을 치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라고 받아쳤다.

변호인단은 몇몇 판사들이 도저히 재판을 관장할 수 없는 부적합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고삐를 조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인 윌리엄 웹은 1943~44년 일본군이 호주군에 저지른 잔학행위를 조사한 적이 있었으며, 소련의 I.M.차라야노프 소장은 법정의 공식 통용어인 일본어와 영어를 하지 못했고, 필리핀의 델핀 자라닐라는 일본군에 붙들려 전쟁포로로 수감된 적이 있었던 전력이 피고들에게 적대적일 것이라는 점을 문제삼은 것이다.

소추위원회는 1928년의 사건까지 거슬러올라가 조사한 55개의 '반평화 범죄' 중 36개 죄목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입증했다. 도쿄 재판의 경우 체포된 전범 용의가 9168명 가운데 A급 전범 46명은 동경에서, B급과 C급 용의자 6676명은 피해 당사국에서 재판을 치렀고, 2846명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조지프 키넌은 기소 요지 낭독에서 '문명에 도전한 전쟁' 에 다름 아니었던 일본의 야만적 행태를 비난했다.

"그들은 기소장에 수없이 열거된 것처럼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침략전쟁을 모의하고, 준비하고, 개시했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인간을 하찮은 소모품처럼 다루었습니다. 이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억압하고 노예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소추위원회가 침략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뉘르베르크 재판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연합국은 '반평화 범죄'라는 것이 국제법상의 근거가 미약하고 법조계에서도 이를 입증하는 데 회의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런던에서 외무부 법률보좌관 에릭 베켓은 도쿄 재판에서 '반평화 범죄' 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쿄 재판에서 이 논점에 대한 방어 논리를 깨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이 어쨌든 어느 정도 악법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말은 연합국이 곧 '법이 없으면 처벌도 없다 nulla poena sine lege' 전제를 위반했다는 의미였다.

소추위원회는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일본이 지난 18년간 펼쳐온 외교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피고들을 다그쳐 전시정책의 범죄성을 억지로 인정하게 하려 한 것은 서투른 처사였다. 도조 히데키 전 수상은 침략을 꾸짖는 키넌의 분노에 찬 추궁을 쉽게 받아넘겼다.

키넌: 도조 씨,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범죄라는 데 동의합니까? 간단히 질문하죠. 전쟁은 반인간적 범죄라는 데 동의합니까?

도조: 전쟁이 범죄라는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승자든 패자든 인간에게 불행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면 동의하겠습니다.


그동안 변호인단은 일본의 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확산 야욕에 대항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뿐이라며 침략 혐의를 부인하려 애썼다. 실제 소련과 중국이 확장정책을 구사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 공산주의 봉쇄 선언을 발표한 1947년 3월 12일 이후였다. 그리스와 터키가 소련의 패권확장에 맞서 싸우고 있다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 지원을 요청했던 시기만 해도 이미 전쟁이 끝난 뒤였다. 그런 만큼 변호인단의 주장에는 시기상 모순이 있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는 냉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웹 재판장은 변호인단이 냉전논리를 끌어들이는 것을 막으려 안간힘을 섰다.

1947년 4월 피고측 변호인 조지 래저러스는 "일본이 중국에서 행한 일들은 모두 공산주의 확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유 있는 공포' 였다."

"우리가 보기에 트루먼 대통령이 말한 것은 그동안 일본이 말해왔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시기상으로 약간의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은 1937년 중국 사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예견했던 것을 입증하는 자료로 손색이 없습니다" 

웹 재판장은 법정에서 연합국의 일원, 특히 소련을 비방하는 소리를 묵과하지 않겠노라 선언하면서 이 말을 비판했다.

"미국인 변호사로서 연합국의 법정이 베푼 크나큰 관용을 악용해 분별없이 적의 편에 서서 악의에 찬 선동을 퍼뜨리는 우를 범하지 마시오"

래저러스는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우리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말이 적의 선동으로 불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웹 재판장은 래저러스 변호사와 충돌한 직후 변호인단이 모인 자리에서 "당신들의 언사를 볼 때 일본의 선동가나 다름없다" 며 성토했다. 피고측이 만주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소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려 하자, 재판부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된 문서들을 모두 기각해버렸다. 이 점에서 도쿄 재판소는 워싱턴의 전적인 지지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의 '반공산주의 십자군' 에 등을 돌린 유일한 기구였다.


'반평화' 죄목은 도쿄 법정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는 '침략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지구촌을 1940년대 후반의 '현 상태 status quo' 대로 굳히려는 의도가 숨이 있었다. 뉘른베르크의 수석 검사 로버트 잭슨은 '어떤 나라가 무슨 불평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침략전쟁은 불만을 해결하거나 그런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합법적인 수단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었다. 다시 말해,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재판헌장에 입각할 경우, 당시 아시아의 화두였던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은 금지된 것이었다. 전쟁 또는 이른바 '무력을 통한 자위'가 금지되었고, 식민지들은 순순히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의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어떤 경우라도 평화에 대한 그런 안이한 인식은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 '현 상태'라는 것은 피지배국이 평화의 이름으로 영원한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이라고 역설했다.

식민지 문제는 재판소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시아와 태평양 국가들은 아직도 백인 식민지 열강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는 재판 후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연합국은 한편에서는 침략적인 외교정책을 들어 일본을 소추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들을 무례하게 팔꿈치로 밀어제치며 이미 체결되어 있던 식민지 협약을 멋대로 어기고 있었다.

일본을 고소하기 위해 나선 당사자는 중국과 필리핀을 제외하면 식민지였던 나라들(한국, 포르모사, 만주)도, 일본에 점령되거나 그들과 싸웠던 나라들(말레이시아, 동인도 제도, 버마, 뉴기니 등) 도 아니었다. 사실 이런 나라 중 그 어디도 참가초청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때문에 지배권에 방해를 받았던 식민지 열강(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호주)이 도쿄 재판소에 나타나 일본을 꾸짖고 있었다. 미국측 검사 솔리스 호로비츠는 일본이 꼭두각시 정권을 앞세워 중국을 강탈했다고 고발했다.

 "일본 관리들이 핵심 요직에 기용되고, 경제체제를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일본의 보호와 감독 하에 국책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입의 일정 부분을 강압적으로 은행에 예치하도록 만들었으면서도, 은행의 이권은 일본인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일본 이주민들이 땅을 몰수하고 약탈하는 사이 중국 농부들은 황무지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18세에서 45세까지 중국인들은 모두 일본군에 들어가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중국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중국의 자원과 부는 약탈당하고, 파괴당하고, 고갈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후 한 중국 교수는 도쿄 전범재판에 관한 세미나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중국을 가장 먼저 약탈한 사람들은 영국인들이었다. 그러나 도쿄 재판에서 영국은 심판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쳐들어왔고, 프랑스가 밀고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미국이 남은 것을 챙겼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모두 똑 같은 도둑이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유럽인들이 일본의 철수를 도우면서 다시 지배권을 회복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총독부가 전쟁기간 동안 100만여 명이 기근으로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비축식량을 약탈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 일본은 1944년 이곳에서 프랑스를 축출했다. 1945년 8월 파리의 특사들이 하노이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반겨준 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죽음을" 이라고 외치는 폭력 시위대였고, 이를 제지해준 것은 일본군이었다. 그 다음 달 미국 전쟁범죄조사단이 악명 높은 일본 헌병대 요원을 체포하러 사이공에 도착했다. 하지만 조사단은 영국, 프랑스, 인도 점령군이 공동의 적인 월맹과의 싸움을 위해 그 요원들에게 다시 총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획을 연기했다.

 

도쿄 재판은 법정에 선 전범들의 면면만큼이나 끝까지 소환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의혹으로 유명한 재판이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수상쩍은 사람이 바로 히로히토 일왕이었다. 각료 중 일곱 명이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는 한번도 소환을 당하지 않았다. 처음에 미국은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정치 고문관이었던 조지 애치슨은 히로히토가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6년 1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일왕은 틀림없는 전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 점령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왕을 쓰러뜨리면 나라가 분열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정말로 히로히토가 혼돈을 막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다. 아니면 그 옥좌를 자신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과 동일시했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일왕은 맥아더가 이끄는 함선의 허수아비 선장이 되어 피고석 출두를 면제받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히로히토가 명목상의 왕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 기간 동안 일왕은 왕궁에 격리된 채 나비 채집으로 소일했고, 군대가 일을 꾸미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일왕을 '완벽한 찰리 맥카시 Charlie McCarthy (복화술사가 조종하는 인형)' 로 묘사했다. 한편 법정 안에서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연합국이 히로히토에게 죄를 떠넘기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썼다. 한번은 미국 관리가 피고측의 조지 래저러스 변호사에게 형무소에 수감 중인 군 관련 피고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이 때 그는 이들 피고의 증언 시 처신 요령과 아울러, 히로히토가 의전상 참석해야 하는 회의에서 군사 작전과 계획이 논의되었을 때 그의 참석은 단지 상징적인 의례였을 뿐임을 치밀하게 주입시켰다.

사실 일왕은 전시정책에 대해서만 개입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외교정책의 실행을 최종적으로 지시했고, 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고관을 가차없이 낙마시켰다. 프랑스측 검사 로베르 오네토의 말처럼, 일왕은 "그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도 거절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오네토는 "그의 재판 궐석은 기소에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피고들이 자신들의 혐의를 알게 모르게 일왕에게 돌리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도조 히데키에게 일왕의 의지를 거스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일본 국민, 특히 고위 정부관리라면 왕의 뜻에 반대하지 않을 것" 이라고 대답했다. 히로히토의 궐석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구태여 숨기지 않았던 윌리엄 웹은 판사석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다 "그래요, 저 대답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잘 알겠지요" 라고 빈정댔다.

1948년 1월 영국측 검사 아서 커민스 카는 법무부 장관 하틀리 쇼크로스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모두가 일왕에게 공공연히 충성심을 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왕이 유죄라는 실질적인 증거가 아닌가"

그가 진주만과 여러 지역의 공격을 승인해주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서방 언론은 좀더 비판적인 논조를 띠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는 히로히토의 양위를 요구했고 맨체스터 가디언은 그가 법정에 출두하지 않음으로써 재판에 '비탄스런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했다. 미국 외무부는 '일왕은 유죄를 피할 길이 없다' 고 전망하기도 했다. 몇 년 뒤 1950년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엄격히 법적으로' 히로히토가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 것은 일왕만이 아니었다. 전쟁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약탈행위들 역시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731부대의 세균전 의학실험에 대한 논의는 미국이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관리들과 사면의 대가로 연구자료를 제공받기로 밀약한 대가로 중지되었다. 중국인들이 겪었던 끔찍한 수난에 관한 문제 역시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에 자행한 전쟁범죄에 초점이 맞춰질 것을 우려했던 까닭에 제기되지 않았다.

 

열한 명의 판사는 전쟁유죄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편이 갈렸다. 도쿄 재판이 시작될 무렵에 종결된 뉘른베르크 재판과 비교되는 데도 매우 민감했다. 1947년 3월 뉴질랜드인 판사 하비 노스크로프트는 본국으로 절망적인 편지를 썼다.

"저는 이 긴 재판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법정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 다룬들 그것이 법에 부합하는 것인지 또는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를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법정이 심각하게 분열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국제법상으로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한발 한발 내디뎌온 그 모든 노력들이 허무하게 좌초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려는 본국으로 돌아간 서방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되었다. 영국의 전직 주 도쿄 대사였던 에슬러 데닝은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우리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해 서방이 전권을 장악한 재판소를 극동에 설치했다. 만약 도쿄 재판이 임무를 완수하는 데 실패할 경우, 서방의 정의는 일본뿐만 아니라 온 극동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도쿄에서 판사들은 윌리엄 웹 재판장이 재판부의 일원이 아니라 법정의 우두머리인양 행세하며 다혈질이고 난폭하다는 불만을 터뜨렸다. 뉴질랜드 수상 피터 프레이저는 수상 벤 치플리에게 그의 소환을 요청했고, 1947년 11월 웹 재판장은 결국 본국으로 소환되어 미국인 판사 마이런 크레이머가 새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소추위원회 역시 내부적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의 경우 영국측 검사 커민스 카는 그가 상습적 음주 때문에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할 지경이라고 자주 런던에 보고했다. 영국의 법무부 장관 하틀리 쇼크로스는 1948년 1월 키넌이 무능하기 이를 데 없고 술독에 빠져 지낸다고 대법관에게 보고했다. 한 영국 외교관은 그가 도조 히데키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도조의 재판은 박스오피스 최고 흥행작이었다. 적의 두목이 재판정에 나타났다는 상징적 장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방청석을 가득 메운 채 스타가 벌이는 스펙터클한 한판 승부에 만족했다. 도조의 빠른 두뇌회전, 명쾌한 답변, 카리스마, 그리고 상대(키넌)를 다루던 솜씨는 왜 도조가 일본의 전시 지도자였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도조의 변호인 키요세 이치로는 침략과 공모 혐의에 대해 250면에 달하는 진술서를 내놓았다. 그것의 핵심은 일본이 침략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단지 합법적인 국가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서방과의 갈등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도조는 이 재판을 통해 일전에 서투르게 자살을 시도한 데 실망했던 일본인들의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쿄 주재 영국 대사관은 본국으로 타전하는 전보에서 "끝까지 일왕을 보호하고자 한 충성스러운 모습 그리고 스스로를 패배의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친 도조의 행동은 일본 국민에게 안도감과 함께, 그기 '진정한 일본인답게' 고소인들에게 당당히 맞섰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변호인단의 재판 준비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피고들은 일본과 미국 변호사들에게 할당되었다. 미국인 변호사들은 나중에 맥아더로부터 부당하게 '악덕 변호사' 라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열성적으로 변호했다. 그러나 자금, 통역관, 조사원, 타자수, 사무직원 등 모든 여건이 열악했고, 증거와 증인을 조사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법정규칙은 모호할 때가 많았다. 증거와 절차를 다루는 전통적 규칙은 적용되지 않았고, 재판장은 검사가 이미 제기한 사안에 대해서만 질의하도록 증인신문을 제한했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과연 몇 명의 판사들이 참석하게 될 지도 예측할 수 없었고 어떤 증거가 채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결론을 얻어낼 수 없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짐에 따라 여론은, 특히 미국의 여론은 재판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이 뻔했다. "결국 시간은 피고의 편에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공방을 질질 끌어 형량을 낮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12일, 2년 6개월을 끌고 4만 8412면에 달하는 증언기록을 남긴 채 재판은 종결되었다. 법정은 일본 수장들의 전쟁범죄와 침략전쟁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일곱 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열여섯 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무죄로 석방된 피고는 아무도 없었다. 두 명의 피고는 미국 연방 대법원에 항고를 하려 했으나 연합국이 나서는 바람에 대법원은 그들의 재판을 다룰 권리가 없다고 결론지어버렸다. 그 동안 미국은 1945년 8월부터 수감되어 2차 공판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A급 전범들을 풀어주었다. 도쿄 재판은 누가 보아도 정치적 실패작이었다. 아무도 재판이 다시 열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판사들은 일본에게 전쟁의 죄를 묻는 문제에 대해 첨예한 입장차이를 보였다. 다수파는 재판부가 처벌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좀더 강경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소수파 중에서는 세 명의 판사가 판결문에 공식 반대한다는 입장을 각자 개진했고, 네 번째 소수파인 웹 재판장은 '별도 의견서' 를 제출했다. AP통신 프랭크 화이트에게 한 판사는 "재판부는 사형선고를 둘러싸고 사분오열되었다"고 전했다. 피고인 중 히로타 코키는 단 한 표 차이로 교수대에 보내졌다. 처형방법을 놓고도 의견이 갈렸는데 결국 총살 대신 교수형으로 정리되었다. 영국 공관은 "이는 일본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피고인들의 유죄판결도 석연치 않다는 의구심을 가지가 할 수 있다"고 했다.

웹 재판장은 "전쟁을 개시하고 종결짓는 과정에서 일왕이 담당한 결정적인 역할이 소추위원회가 제시한 증거들의 주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일왕이 소추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판단은 그들의 몫이었겠지만 영국 법정은 주모자란 으레 당연히 처벌을 면하게 마련임을 고려에 넣었을 것" 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런던 행정부는 웹이 영국 법정을 언급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고 맥아더 사령관은 "웹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반 히로히토 정서에 편승하고 있다" 고 비난했다.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자신의 주장을 장장 1235면에 걸친 대문서로 내놓았고, 나중에 원자폭탄 희생자와 참혹한 파괴현장을 담은 사진을 꾸며 캘커타에서 책으로 발간하면서 재판소의 권위를 부정하기까지 했다. 그는 "식민열강은 아시아 정부들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일본과 똑같거나 더 나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고 주장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폭격한 것은 제1,2차 세계대전 때 독일제국과 나치 지도차들이 수행한 작전들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만행이었다고"고 힐난했다.

이 인도 판사의 주장은 법순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도쿄식으로 법을 개정하는 데 반대하고 이미 존재하는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내 판단으로는 현재의 국제법에 제시된 규칙을 무시한 채 새로운 범죄를 정의하고, 그 법에 따라 죄인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은 승전국의 권한을 넘어서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소급입법을 혐오하는 한, 이것은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어떤 나라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이는 곧 국제법에 반해 권력을 함부로 침탈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다."

팔은 맹렬한 반공산주의자였으면서도 식민주의에 대한 강한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시아 민족주의는 당시 인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수년이 지난 뒤 네덜란드 판사 베르나르드 필링은 이렇게 회고했다.

"인도 판사는 작금의 식민지 현실에 가장 분개했다. 200년 전 유럽이 아시아를 정복한 뒤로 지금까지 지배권을 누리고,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일본의 전쟁, 그야말로 '아시아 민중을 위한 아시아' 라는 슬로건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 같았다. 그는 인도군에 입대해서 일본군과 함께 영국군에 대항해 싸우기도 했다. 그는 철두철미한 아시아인이었다."

실제로 관련 보고서들은 비록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인도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들이 희생되었지만, 인도 언론이나 대중은 팔이 재판에 대해 보여준 반대견해를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그들의 식민종주국 영국에 대한 반감이 더 컸음을 시사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앙리 베르나르 판사는 "나는 일본의 장성, 외교관, 정치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데 바쳐진 이 재판이 실로 우리가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 며 기독교적 관용을 호소했다. "인간의 목숨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냉혹하게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전쟁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폭력적인 수단이다. 전쟁의 승자는 누구든지 득을 보고, 아무도 그를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 브렌누스가 이야기했듯이 "패자는 비참하도다 Vae Victis"

도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세계의 정치지도는 바뀌고 있었다. 중국은 어느새 아시아에서 새로운 위협적 존재로 떠오르고 반면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반공산주의 동맹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어제의 적들 사이에 새로운 동맹관계가 맺어졌다. 1952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정을 끝냈지만 수감 중인 전범들은 여전히 마찰의 불씨였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의 고초에 감상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의 석방운동은 조금도 수세적이지 않았으며, 실제로 정부관리들이 주도하고 일본 왕실까지 나서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53년 한 영국 외교관은 캐나다 대사 초청 칵테일 파티에 참석했을 때 타카마츠 왕세자가 초청인사들을 붙들고 전범들의 석방을 강하게 요청했다고 보고했다.

영국 외무부는 전쟁포로수용소 생존자들의 의견에 동정적이었고, 도쿄 주재 대사관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대사관은 외무부의 일본 태평양국이 "전범 문제를 다루는 데 대사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시했다. 도쿄 대사 에슬러 데닝은 "정치적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본국 정부는 몇몇 영국인들의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데 연연하고 있다. 처벌을 당한 패자의 마음에는 우리의 적들에게 이용당할지 모를 불만이 자라나고 있다"고 불평했다.

도쿄 재판에 대한 역사의 판결은 데닝의 예언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이 재판은 흔히 '실패한 뉘른베르크'로 일컬어진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연합국의 단결력이 겉보기에 아직 완전했을 때 열렸지만, 도쿄는 그것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각국이 독립을 회복한 서구 유럽에서 열렸고, 도쿄는 아직도 각국이 자유를 부르짖고 있던 아시아에서 열렸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소추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갈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The Rise and Rise of Human Rights: Human Rights and Modern War - Kirsten Sellars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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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이 되기 몇 달 전, 알 카에다 신병을 모집하는 비디오테이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밀반출돼 아랍 세계 전역에 유포됐다. 오사마 빈 라덴과 고위 참모진은 무슬림 젊은이에게 이슬람을 보호하고 전파해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가 있다고 설파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원년인 622년, 예언자 모함메드와 "추종자 sahaba" 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면서, 현재 아랍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서구 문명의 유해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서구 문명의 폐해를 치료할 방법은 오로지 신의 말씀에 있다. 바로 히즈라 hijra와 지하드jihad이다"라고 덧붙였다.

히즈라는 무슬림이 종교 deen 적 의식을 거행할 수 없는 곳에서 이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땅으로 이주하는 것을 말한다. 지하드는 신의 뜻을 받들고 기리기 위한 전쟁을 의미하여 이는 무력을 강조한 오사마 빈 라덴의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모함메드는 메카에 이슬람을 뿌리내리기 위해 13년 동안 고초에 시달렷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메디나로 이주하는 것이 탄압을 피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가 될 것이라는 계시wahi에 따라 이주를 결심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틈을 타 모함메드와 무슬림 추종자는 이교도 jahili 의 눈을 피해 메디나로 피신했다.

히즈라는 당시 모함메드의 이주에서 비롯됐다. 무슬림에게 정신적 영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비디오테이프에서 언급한 지하드는 624년 모함메드가 바드르 Badr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이교도를 모두 처단하고 메카로 금의환향한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빈 라덴은 미국과 서구세게에 항전하다가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등지로 피신해 다닌 본인의 경험을 622년 모함메드가 메디나로 이주했던 것에 비춰 이야기했다. 이는 빈 라덴과 추종자 세력이 예언자 모함메드가 그랬던 것처럼 무슬림 전체를 대신해 수모와 박해를 감수하며 희생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궁극적으로는 신의 뜻과 예언을 받들어 "의로운 전임자 salaf"를 추종하는 빈 라덴 세력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적 메시지도 담겨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21세기의 메디나였던 것이다.

꾸란 Qur'an 에서 지하드에 대한 공식 승인은 메디나 시기에 이르러 처음 언급됐다. "침략하는 자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이 너희[신도]에게 허락되나니 모든 잘못은 그들(불신자)에게 있노라. 신은 전지전능하사 너희에게 승리를 주시니라. '우리의 신은 오직 알라뿐' 이라고 말한 것으로 말미암아 부당하게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이 있노라" (22:39~40) 모함메드는 메디나에서 전쟁 gital 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전쟁은 이제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됐다. ("비록 싫다 해도 너희에게 지하드가 허락되었노라. 너희가 싫어하나 복이 되는 것이 있고 너희가 좋아한다 해도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신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2:216) 이것은 일종의 회개 tawba 이자 신과의 언약이었다. "신을 섬기는 사랑의 생명과 재산은 모두 신의 것이며, (대신) 신도는 신의 품에서 살 수 있다. 그들은 신의 뜻을 섬기기 위해 싸우고 죽고 죽인다: 법과 복음과 꾸란을 통해 절대 복종을 약속한 것이니, 신보다 복음에 더 신실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전쟁에 대한 승인은 바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의무로 이어졌다. 모함메드는 무슬림에게 지하드를 실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므로 그대 혼자서라도 신의 뜻에 따라 투쟁하고 신도를 격려하라. 신께서는 불신자를 미리 제지해 주시리라. 신은 힘이 있으시되 가장 강하시고 벌을 주시되 가장 큰 것을 주시니라" (4:84)

지하디스트의 여정은 멀고 험난한 길이었고 신의 뜻을 섬기는 무슬림은 예측 불허의 길을 떠나야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했던 모함메드를 언급하면서 무슬림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지원과 도움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 과연 얼마나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30년 넘게 계속된 이슬람을 둘러싼 분열은 무슬림의 사회기반과 정치체제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혼란은 아랍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긴장은 멀리 뉴욕, 워싱턴, 마드리드, 런던, 파리 등지에까지 미쳤다. 현대 지하드주의 jihadism 의 궁극적 목적은 무신론이 지배하는 국내외 정치,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이슬람 교리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지하디스트 간 내분이 심화됐고 오사마 빈 라덴과 이인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 Ayman al-Zawahiri 는 지하디스트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계획을 구상했다. "가까운 적 al-Adou al-Qareeb" (무슬림 이단자, 변절자) 이 아닌 "먼 적 al-Adou al-Baeed" (이스라엘과 미국 등 서구 세계) 을 대상으로 삼은 투쟁이 시작됐다. 무슬림 대부분은 아랍 세계의 내분과 갈등 고조의 원인으로 미국을 꼽았다. 알 카에다 지하디스트는 미국을 상대로 한 자신들의 투쟁이야말로 이슬람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고 믿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을 통해 자신과 추종자를 포함한 숨은 세력을 무슬림 세계에 보여주고, 자신들이야말로 이슬람 공동체 ummah 를 이끌 지도자임을 알리려고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 같은 대담한 공격만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성공여부는 오직 미국의 반응에 달려 있었고, 빈 라덴은 미국이 알 카에다에 반격을 하고 9.11과 상관없는 국가까지 가세한다면 분노한 무슬림이 지하드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작 아랍 사회에서 알 카에다에 가담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실제로 9.11은 무슬림 사회의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서구 언론은 지금도 9.11이 이슬람 공동체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또 당시 자살폭파 대원 19명의 존재는 무슬림 정치 문화의 비 도덕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슬람 공동체에서 계속되는 자살폭파와 참수 같은 사건은 이러한 평가가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9.11은 이슬람 공포증을 고조시켰으며 이슬람 지하드주의는 서구 세계에 이슬람과 일반 무슬림이 죽음의 문화를 수용하고 전파시킨다는 잘못된 관념을 강화시켰다.

많은 무슬림 젊은이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정치, 문화적 억압에 시달리며, 직장을 구하지 못해 집을 얻거나 결혼 자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미묘한 시선을 항상 느껴야 했다. 젊은 무슬림은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집단 처벌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근본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한다. 현재 30세 이하 무슬림은 이슬람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한다. 그들은 권리를 상실한 채 거대한 유권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좌절한 젊은이가 모두 폭력성을 띄거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즘은 아랍 세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뿐더러 아랍 세계의 전유물도 아니다. 수십 년 전, 온갖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내세운 유럽 무장 단체가 전 유럽을 초토화하고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 테러리즘의 잔학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조차 이러한 위기가 유럽과 서구문화, 종교타락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서구 기독교 부패가 문제 원인이라고 역설한 사람도 없었다.

일부에서는 알 카에다 테러 전술이 이슬람의 전통 지하드 기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최근 유럽에서 형성된 일련의 급진적이고 진보적 운동 또는 제 3 세계 운동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허무주의를 용인하지 않는 이슬람에서 알 카에다는 예외적 분파이다. 알 카에다는 자신의 고행이 모든 무슬림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들의 정치 투쟁을 종교적 수사로 선전한다. 오사마 빈 라덴이 지하드를 외면하는 동료 무슬림을 질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믿음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다른 어떤 것도 우선시 될 수 없다. 믿음 없이 어떻게 종교가 존속될 수 있겠는가. 나라의 존속과 영광이 모두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 적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만 종교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너희가 예루살렘과 이라크에서 서구 세력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들이 너희를 몰아낼 것이다. 또한, 너희에게서 성지의 땅[사우디아라비아]를 빼앗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바그다드를 빼앗았고 내일은 리야드 Riyadh 를 점령할 것이다"

과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자 그 안에 억눌려 있던 정치, 사회적 갈등이 쏟아져 나왔고 소수집단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마음대로 분하라고, 뒤이어 민족주의 국가가 건립되면서 시작됐다. 반유대주의는 애초에 유럽에서 발생했다. 반면, 이슬람 공동체에서 반유대주의는 갑작스럽게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강제 추방되면서 생겨났다. 여전히 무슬림 인종 차별주의자가 접하는 글들은 주로 유럽에서 나온 반유대주의 선동문 (시온의정서나 홀로코스트 부정론 등) 이다. 반유대주의 정서는 다분히 정치적임에도 순전히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유럽인과 유대인의 인종적 차이에 근거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아랍 세계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아랍인과 유대인은 같은 셈족이고 박해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의 아랍인은 자신들이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요르단의 대표적 이슬람주의자 라이트 슈비알라트 Laith Shubialat 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인종을 배척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언론에서는 연일 불안정한 아랍 사회 소식을 보도한다. 물론, 중동 지역에서 정치 격변이 지속된 건 사실이다. (중동은 이슬람이나 무슬림과 동의어가 아니다. 중동 지역 내 모든 무슬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무슬림이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으며 이 지역에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도 많다) 잇따른 자살폭파 사건은 아랍 세계에 야만성과 폭력성이 만연해 있다는 편견을 증폭시켰다. 서구 국가들은 값싼 아랍산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세계 경제가 중동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흔들릴까 우려한다. 다만, 한 세기 이전 서구 식민주의가 이 지역의 자유와 자결에 대한 열망을 꺾었다는 건 분명하다.

서구식 정치 체제는 취약하나마 무슬림 지역 내에 뿌리내렸다. 현재의 국경선이 재편성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지역 내 지배자는 기존 정치 질서를 유지할 광범위한 유인책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강대국 역시 이 지역에 많은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이 이웃 국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이라크의 속국으로 편입시켰을 때, 미국은 페르시아만에 50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강대국은 이 지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이익을 챙겨갔다. 서구 세력의 영향으로 권좌에 오른 아랍 독재자는 자신의 생존을 서구 국가에 의탁하는 대가로 충성을 서약했다.

식민주의 개입이 아니더라도 국가형성 과정에는 장기간에 걸쳐 복합적이고 큰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레바논과 무슬림 국가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정치, 사회 발전은 역사적 패턴과 대체로 일치한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는 민주주의가 안정권으로 진입하기 전에 유혈 투쟁을 경험했다.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슬림 국가는 종교적 언어와 색채로 발전단계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강력한 반체제 수단으로 등장한 이유는 권위주의 무슬림 지배자가 세속적, 진보적, 비종교적 반대파를 성공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한 이집트 무장 이슬람주의자는 "오늘날 아랍 정치권 내에서는 세속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민족주의자는 전혀 발 디딜 틈이 없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무슬림 독재자조차도 시민사회의 중추이자 반체제 조직의 피난처가 된 모스크를 장악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제한적 민주주의의 직접 수헤자는 지하디스트나 자유 민주주의자가 아닌 주류 이슬람주의자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슬람 활동가는 이집트, 이라크, 이란,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 파키스탄, 쿠웨이트, 터키 등지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하마스(Hamas: Islamic Resistance Movement)가 예상을 뛰어넘는 큰 차이로 승리했을 때 전 세계는 긴장했다. 132석 중 74석을 차지한 하마스는 겨우 45석을 얻은 기존 파타 Fatah 당을 권좌에서 내몰았다.

무슬림 표가 주류 이슬람주의자의 입지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속주의 지배자는 일자리 창출에 실패했고 각종 사회 복지혜택과 교육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 또, 외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국방력을 강화하지 못했다. 점점 더 많은 무슬림이 기존 정치권의 무능함헤 회의를 느끼고 이슬람주의자가 좀 더 효과적 대안이라고 믿었다. 무슬림은 이슬람주의자의 청렴함에 감명받았고, 세속주의 정권의 실책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에 통쾌함을 느꼈다. 또한, 하마스 같은 이슬람주의자는 누군가 자살폭파 때문에 사망하더라도 남은 가족의 생계와 건강을 돌봐주고 최빈곤층 자녀에게 무상 초등교육을 제공하는 등의 정책을 썼다.

하지만 이슬람주의자 역시 대중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민생복지에 힘쓰지 않고 군사적 모험만을 감행한다면 세속주의자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무슬림 유권자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도 아니다. 그들은 정부의 탄압과 부패, 무능함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정치인을 내쫓으려는 의지도 있다.

이슬람 모스크는 민주주의의 요람인가 아니면 호전주의의 발상지인가? 모스크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한 것으로 보인다. 지하디스트는 대원을 모집하거나 각종 전략전술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에 모인다. 거의 모든 사람이 특정 모스크에서 "부름"을 받고 그 모스크를 중심으로 지속적 교류를 나눈다. 9.11 자살공격 대원이 처음 지하드주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유럽 모스크 내 회합이었다.

대다수의 모스크는 순수하게 종교 의례를 거행하고 참배와 명상을 위한 장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많은 사제가 정치적, 종교적 반체제인사를 모스크에 수용하고 극단주의자가 피신할 수있도록 허용한 것 또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수사 뒤에 감춰진 정치적, 사회적 목적이나 열망을 파악하는 것이다. 종교적 수사는 체제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나 조직이 "가까운 적" 과 "멀리 있는 적" 모두에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기이다. 이슬람은 세속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이들을 지원해왔다. 세속 민족주의는 이미 수십년 동안 시민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 파탄과 군사적 패배를 가져왔다. 지하디스트들은 1967년 아랍 세계가 이스라엘에 패했던 사건을 기점으로 "변절한" 지도자에 대한 저항이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무장 이슬람주의로 재무장한 지하디스트는 실패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부패한" 서구 자유주의에 대항해 전면전을 선언했다. 이들은 무능한 무슬림 지배자를 내쫓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종교가 정치를 위한 도구가 된 셈이다.

지하디스트의 투쟁은 종교가 아닌, 정치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꾸란에서 테러리즘을 장려한다는 비난은 신약성서에서 십자군을 장려한다는 비난처럼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는 수많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같은 구절이라도 평화와 관용을 도모하는 것으로도, 전쟁과 편협을 부추기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문제는 종교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무슬림과 "이슬람주의자"는 이슬람이 ㅁ웟인지에 대한 견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이슬람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무슬림은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평신도지만, 이슬람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은 권력을 장악해 국가와 사회 전체를 위로부터 이슬람화하는 것이다. 지하디스트에도 많은 부류가 있듯, 이슬람주의자 중에서도 온건주의에서 주류 이슬람주의, 호전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조직이 존재한다. 수니 Sunni, 시아 Shiite, 살라피 Salafi, 수피 Sufi, 와하비 Wahhabi 파 등은 부족(오늘날은 국가)과 철학적 전통 (어떤 종교 문구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 차) 에 따라 분류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이슬람주의는 대부분 수니파이다. 사우디에는 살라피와 와하비파가 혼재되어 있고 이란 이슬람주의는 대부분 시아파이다. 종파들은 여러 방식으로 교차하고, 상호 영향을 주며, 결속하거나 분리되기도 한다. 특정 종파는 다른 종파에 비해 더 배타적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법 Shariah 에 따라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정부를 수립하려는 공통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이 목적 외에 '이슬람' 외교 정책이나 '이슬람' 경제 정책에 대한 종파 간 합의가 부재하여 구체적 사회 모델도 제시하지 못했다.

무장 이슬람주의자, 지하디스트들의 시각은 급진 좌파에서 급진 우파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하다. 놀랍게도, 그들의 견해는 자신들이 반대하는 세속주의 지도자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슬람은 무슬림의 도덕성, 정체성, 서구화와 미국화에 대한 두려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는 이슬람을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 종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란, 수단, 과거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가 궁극적으로 건립하고자 하는 정권 역시 세속주의 독재정권만큼이나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적 수사와 상징이 넘쳐나지만, 이들의 내부 통치체제에서 특별히 이슬람의 고유한 요소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란인과 수단인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경제난을 우려하고 있고 이슬람학자와 이슬람주의자가 조장하는 사회정치적 불안정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탈레반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정권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초기 단계의 정부마저 붕괴시켰다. 이는 이슬람 국가 건설 가능성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란, 수단, 아프가니스탄 같은 국가들은 이웃 국가와 다른 지역에 혁명을 파급하는 데 자신의 빈약한 자원을 소진해 버렸다. 혁명을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려 했던 시도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특히 국제화된 지하드를 목표로 하는 알 카에다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탈레반은 치명타를 입었다. 9.11 이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정권 통치하에 있는 이란, 수단 정부는 내부적으로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더 번째 역설은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가 무슬림 세게에서 정치적 공방과 논의를 심화시키는 데 간접적이지만 적극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터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의 세속적 전제군주에게 정치 체제를 개방하고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가 없었다면, 아랍 세속주의 독재자는 결코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의지를 갖추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디스트는 서구 민주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의도와 다르게 아랍 지역 내 민주적 변화를 주도했다. 심지어 일부 이슬람주의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더 광범위한 개혁을 주장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드 조직인 알 자마 알 이슬라미야 (Al-Jama'a al-Islamiya)와 알제리의 이슬람 구국 전선(Islamic Salvation Front)은 현재 민주화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됐다.

그러나 민주화를 주장하기까지 이들이 거쳐 온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피로 점철된 역사였다. 그들은 가부장적이고 스스로 신앙, 전통, 그리고 정통의 수호자라고 자신한다. 주류 이슬람주의자조차 여성의 권리 신장이나 예술가의 표현 자유에 반대했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주의자는 여성의 투표권이나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튀니지, 알제리, 파키스탄, 다른 무슬림 국가의 이슬람주의자는 여성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을 할 수 있는 권리, 남성의 승인없이 여행하는 권리, 의회나 정부 기관에서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 법률 제정을 반대한다.

많은 이슬람주의자, 지하디스트가 세속주의와 타협하고 자신의 견해를 재고하고 있다. 무슬림 사회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종교보다는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고, 전제적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적 소환(Da'wa)을 통해 아래로부터 점진적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보수적 "신 원리주의" 가 권력쟁취를 통해 위로부터 급진적으로 사회를 이슬람화하는 혁명적 지하드주의를 서서히 대체했다. 그러나 이는 알 카에다를 포함한 호전주의 세력과의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알 카에다에게 이라크 전쟁은 행운이었다. 내부 혼란에 대한 우려를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투쟁에 신뢰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사건이었다. 미국 관료들 역시 이라크 전쟁이 결과적으로 알 카에다가 신병을 모집하고 조직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사회의 급진적 이슬람화를 추구했던 세력이 둔화하는 추세를 바꿀 수 없었다.

지하디스트가 국제 사회와 일반 무슬림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일부에서는 노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일부 소조직이나 분파가 자행하는 테러리즘은 계속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테러리즘이 더 넓은 지지층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은신처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하디스트는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을 자극해 이슬람 공동체가 피해를 봤다는 비난을 국내외로부터 받고 있다. 오로지 기적만이 지하드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혹자는 이라크가 계속 점령지로 남는다면, 그것이 기적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  Fawaz A. Gerges "Journey of the Jihadist: Inside Muslim Militancy"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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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영국에는 Imperfect Enjoyment라는 제목의 유명한 두 영시가 있었다.한 편은 조지 에서리지 경, 다른 한 편은 로체스터 백작 존 윌모트가 지은 시로, 무려 실패한 성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섹슈얼리티를 전쟁에 비유한 내용이다.

'수행 불안' 이라는 말은 정신분석학 용어인 ejaculation praecox (조루증)' 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는 남자가 생리적 심리적으로 남자다움의 기준에 못 미치는 행위를 했을 때 쓰는 말이었다.

 

두 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긴박감이다. 두 작가 모두 자기가 겪은 성적 상황을 시 자체의 전개와 나란히 흐르게 하려고 애쓴다. 에서리지의 시는 격식과 미적 균형으로 가득한데, "몹시 정념어린 대화를 나눈 후에" 하고 에서리지의 시는 시작한다. 저항의 시도는 곧 묵종으로 바뀌지만, 여인의 팔이 그를 반기는 것처럼 보였던 결정적 삽입 순간 '내 정열이 열정을 압도하는' 바람에 에서리지는 행위에 실패한다.

 

에서리지는 육체적으로 실패했어도 자신을 경배자에, 여인을 성지에 빗대는 비유를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이윽고 남성을 병사에, 여성을 포위당한 마을에 빗대는 적대적 비유를 줄줄이 이어 나간다.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힌 순간, 나는 내가 정복한 성벽 앞에 죽어 넘어졌다"

 

비록 죽어 넘어진 것은 자신이었지만, 에서리지는 자기와 파트너 양측이 생리적으로 사정 행위를 마친 것으로 친다. 그러나 뭔가 미진한 구석이 남는다. 성교는 어떤 면에서 상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했어야 할 행위를 / 우리는 불행이 따로 치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열이 너무 높이 치솟는 바람에 오히려 쾌락의 불길을 꺼뜨렸고, 사랑이 오히려 애욕을 소멸시켰으며, 영혼의 결합이 오히려 육체의 결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남자 쪽에서 하는 말이고, 여자 쪽은 아레티노의 <체위>시에 나오는 밀사와는 달리 성적인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자 쪽이라고 해서 나름대로 자기 잣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미진하게나마 의사표시를 할 기회가 주어지자 여자는 실제로 행위가 너무 빨리 끝났다는 데 놀라움을 드러내는 듯하다.

"끝났음을 깨닫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찌푸렸다 / 유희를 시작한 줄도 미처 몰랐으니"

그러자 시인은 상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데, 여기에는 딴 속셈이 있다. 시인의 말을 들어 보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사랑과 전쟁이라는 이교도적 의식을 치를 힘을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너무 아름다운 것이 그대의 불행"

다른 말로 하자면, 에서리지는 어쩌면 여자에게 육체적으로 침투하는 데는 실패했을지언정 그래도 "승리했다". 기지 넘치는 언어로 육체의 실패를 갚았고, 시적인 언어로 성적인 무능함을 갚은 것이다. 대재앙도, 눈물도 없다. 모든 탓은 여성에게로, 여성의 아름다움과 눈동자의 힘으로 떠넘겨진다. 에서리지의 시는, 여성의 '불가사의'를 침투하여 정복하려 했던 남성적 욕망이 제풀에 고개를 숙이고 성적 패배를 맞는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에서리지는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가져다 짠 언변의 그물로 애인을 얽어매어, 성적 패배를 언어로 벌충할 수 있는 통제력이 곧 자족적인 남성성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손실을 복구한다.

 

에서리지의 시 속 자아상은 점잖은 구애자로, 언어와 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남성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낭패스러운 상황조차 얼마든지 모면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편 그와는 대조적으로, 에서리지보다 어리고 참전 경험이 없는 로체스터는 무능한 병사를 남성의 무력함을 보여 주는 비유로 들어, 성적인 패배로 남성 자아가 입은 부상을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에서리지의 곱상한 '시적' 발단과 달리, 로체스터의 시는 즉각적으고 그 육체적 상황으로 뛰어든다.

 

갈망하는 내 팔에 꼭 안겨 알몸으로 누운 그녀,

나는 사랑으로, 그녀는 마법으로 가득하네.

정열의 불꽃이 우리를 똑같이 달구고,

다정함이 우리를 녹이며, 욕망이 우리를 태우네.

팔과 다리, 입술이 밀착하여 포옹을 갈망하니,

그녀가 나를 가슴에 품고, 그 얼굴로 나를 빨아들이네.

 

에서리지의 정인들은 자기들 역할에 걸맞게, 각자 경배자와 성인, 병사와 포위된 도시라는 은유의 옷가지를 걸쳤지만, 그 사이로는 언급이 생략된 부위가 서로 접촉하기 딱 알맞은 틈새를 남겨 두었다. 반면, 로체스터의 정인들은 확실히 알몸인데, 다시 말해 양측 다 어떤 고정된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옷을 벗어, 남성과 여성 양측에 숨겨진 그 모든 약점들을 드러낸다.

수영복과 성정적인 광고, 의사의 진찰실에 이미 익숙한 현대인의 시점으로는 과거에 나신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해도 남녀 간의 차이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여성의 나신은 불가사의한 힘 같은 것을 품은 한편, 남성의 나신은 음경의 신비감과 실제 크기 사이의 격차가 막대한 까닭에, 남성의 자기 주장을 약화시키고 바보처럼 보이게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체스터는 바로 그 신비로운 음경과 육체적인 음경 사이의 불일치를 주제로 삼는다. 에서리지가 세련된 방식으로 성적 자존심을 되찾는 데 비해, 로체스터는 시나 시적인 감수성 어느 쪽에도 자기 정체성의 근원이라는 작위를 수여하지 않는다. 로체스터에게는 초월적이거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두 육체만이 있을 뿐이다. 로체스터가 생각하는 남성 육체는 훗날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전능한 남성 육체가 아니다. 그리고 로체스터는 남자든 여자든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남자의 감옥이 여자의 감옥보다 훨씬 엄혹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로체스터는 허세스러운 어조로, 여자의 혀가 자기 입에 들어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저 아래의 벼락을 / 때리라고 명한다" 고 서술한다. 제우스 신의 애인이었던 인간 여성 세멜레가 제우스에게 신의 본모습을 보여 달라고 조르자, 제우스는 그 청을 들어주어 세멜레를 수태시키는 동시에 (여기에서 태어난 것이 디오니소스) 산산조각 내 버린다. 남자의 성 능력에 대한 허풍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이야기가 있을까. 그렇지만 로체스터는 하필이면 에서리지의 점잖은 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의 육체적 권능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에 청천벽력 같은 성기능의 상실과 맞닥뜨리고, 그리하여 신과 같은 힘을 가졌던 남근은 급작스레 영 못미더운 살덩어리로 영락한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바삐 그곳으로

내 영혼을 그녀 심장으로 실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는 순간에

나는 축축한 환희로 온통 녹아내렸으니

정액으로 녹아 온갖 틈으로 새 버렸네,

그녀가 닿은 몸 곳곳으로 인해 그리 되었네.

 

여자의 손, 여자의 발, 여자의 외양 자체가 바로 성기다. 새다 spend 라는 말은 19세기 후반까지는 영어에서 사정을 뜻하는 흔한 말이었다. 지금은 그 말 대신에 온다 come 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지금 맥락에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여기 그려진 상황은 도착이 아니라 상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녹이는 벼락" 이라는 과장된 고전적 어투가 오히려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내 안의 제우스가 안에서 폭발해 나를 용해시킨 것이다.

 

에서리지는 대단히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자화자찬을 진통제로 이용했지만, 로체스터는 자기 언어로는 자연적인 패배를 만회하지 못한다. 시와 신화의 전통적 리듬과 명령과 '정념 어린 대화'는 육체적인 것, 정액과 성기를 말하는 직접적 단어들 앞에 야만적 패배를 당하고 만다. 앞서 에서리지의 패배를 살짝 한 발 물러난 후퇴로 친다면 로체스터의 패배는 초토화에 가깝다.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자의 허풍은 파트너의 무심한 장악력을 당해 내지 못한다. 여자의 성적 정체성은 전신에 흩어져 있는 반면 남자의 성적 정체성은 (좌절한) 음경에 집중적으로 투자되어 있다 보니,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려다 도리어 자기 성적 정체성만 잃고 만다. "여자의 손, 여자의 발, 여자의 모습 자체가 성기다" 여자의 다양성은 여전히 평온함과 확고함을 유지하는 반면, 남자의 통일성과 힘은 조각조각 나 버렸다.

 

로체스터의 상대 또한 에서리지의 상대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여자는 우선 '그 찐득한 쾌락들'을 닦아 내고 나서 당신의 '사랑과 희열' 이 그게 다냐고 '우리는 쾌락에도 빚을 갚아야 하지 않나요' 하고 묻는다. 그 쾌락이란 자신의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남성 행위의 주된 목표는 아무래도 성적으로든 시적으로든 여자로부터 감사를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못다한 쾌락'은 때 이른 조루와 마찬가지로, 성교에서 여성도 성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암시하는데, 영어에서 '성교'를 뜻하는 intercourse 라는 말이 상호 간의 성적 쾌락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은 18세기 후반에서나 가서다.

 

만약 이것이 에서리지의 시였다면, 이때쯤 해서 여성에 대한 아리따운 찬양으로 패배를 은근슬쩍 감추고 있으리라. 그대의 지나친 매력이 정인의 애욕을 사랑으로 돌려놓았고, 그럼으로써 정상적인 남성 제어력을 잃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로체스터가 맨 처음 보이는 반응은 축 늘어진 현재에 대한 애수와, 왕성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자랑을 버무려 늘어놓는 것이다. 그 실패를 무마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과 성적인 부분을 떼어 놓는 것뿐이다. 이전에 그는 자기 음경을 웅장하다고 칭찬하고 마치 신인 양 그 위를 선회하면서 나아길 길을 지시했다. 하지만 통제력을 잃은 지금, 음경은 "내 정열을 그르치고, 내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입혔다는 철저한 힐난을 당해야 했다.

 

이로부터 한 세기쯤 지나서 쓰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그녀는 정복하기 위해 조아린다 she stoops to conquer> 의 주인공처럼, 화자는 하층계급 여성들에게 구애할 때는 통제와 자기 억제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가 실지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은 그 어떤 방어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로체스터의 시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에게서 성적인 부분을 떼어 내어 화자로, 적으로 삼아 공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전에는 성적인 무용에 대한 환상 속에서 그것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17세기 이래 줄곧 남성 문학의 기저에 흐르는 환상이다.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 온, 성적이고 음란하여 입 밖에 낼 수 없는 부분이 이제 복수의 기회를 맞아, 내 인성의 기본 갑주로 바뀌어 밝은 낮의 나를 잠식한다는 것이다.

 

남의 눈에 보인다 함은 곧 남에게 평가당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남자는 자기 음경이 꼿꼿하고 준비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면 어떤 여자도 자기 몸에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머리맡에서 제언했듯이, 어쩌면 '문명' 에서 진보의 첫 걸음, 그리고 육체적인 것을 떠나 은유적인 것을 향하는 움직임은, 남 앞에서 음경을 가리는 행위와 더불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부족하게 되면서, 권력자들은 (음경의) 크기에 따라 권력을 나누려고 하거나 누가 누구 앞에서 쪼그라드는지를 관찰해 서열 등급을 나누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잘 부풀려진 예의 바른 살 주머니가 등장한 이래, 로체스터는 그 신체 부위에 다시금 관심을 불러왔다고, 아니면 그 부위의 모든 나약함에 처음으로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로체스터는 여기서 섹슈얼리티로 인해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세당하는 현대 남성상을 예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거세의 핵심적인 부분은 자기 음경을 타자로, '허세꾼'으로, 허세를 부려 비겁함을 감추는 허풍선이 병사로 인식하는 것이다. 로체스터의 시는 발단에서는 남성의 성적인 힘을, 그리고 자기 음경을 "사랑의 화살" 이자 "모든 것을 녹이는 벼락"으로 낭만화하지만 끝에 가서는 "나의 가장 형편없는 부분, 그리하여 가장 증오스러운" 것이라며 공격하고 "1만 개나 되는 더 능력 있는 프릭들이" 연인에게 자기가 주지 못했던 만족을 주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망신스러움과 더불어, 온갖 성병을 모조리 비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전쟁과 전사의 자세가 겉보기에는 아무리 굳건해 보여도, 남성성의 교활함과 불안정함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허세꾼"은 또한 거의 전적으로 군사적인 무용만 가지고 남성성을 규정하는 영웅시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한다. 로체스터는 프로이트의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이미 한참 전에, 군사 공격의 핵심 성적 행태인, '강간과 약탈'의 '강간'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무대에 필수적인 것이며, 남의 모국과 성교를 한다는 것이 내 승리를 확정하는 적절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드러내 놓고 조롱한다.

 

조루라는 경험을 가지고 시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시에서 여성을 찬양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고, 시인은 자기들이 여성들을 더 칭찬하고 싶은데 능력이 모자라 그러지 못한다고 고백하기 일쑤다. 에서리지와 로체스터는 둘 다 남성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다루는 시에서 이 전통을 희롱하며, 둘 다 '사랑' 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의 쾌락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한 발짝을 내디딘다. 에서리지는 넘치는 기지로 이 쾌락에 기여하지만, 로체스터는 여성에 대한 성적 무지로 인한 무능함과 그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무능함을 연결 짓는 데 한층 더 몰두한다.

 

조루를 '발기불능' 으로 부를 때, 거기에는 이미 섹슈얼리티가 곧 통제력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에서리지는 기지와 언어에 대한 통제력으로 남성 육체의 나약함을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남자 구실을 못했을' 때도,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로체스터 시의 언어는 정의하기 어렵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섹슈얼리티의 현장인 남성 육체로부터 솟아난다. 비록 로체스터는 과거의 전형적인 남성의 자기 주장을 조롱하긴 하지만, 그 자신도 거기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 역시 남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남성성 전통들의 복제물이 되는가를 극화하는 까닭이다.

 

더 이전 시대의 시들은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설파할 때, 고통이나 희열, 부상이나 종교적 경험의 이미지에 가까운, 채움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오르가슴을 일종의 죽음으로 보는 후기 르네상스 이미지들은 구체적으로 의식 소멸, 통제력 상실, 찰나적인 공적 정체성 망각을 이야기한다. 16세기 문학은 어떤가 하면, 대부분 사랑은 논하되 남성의 성행위는 논하지 않는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135번 소네트는, 영어에서 음경의 다른 표현인 will 을 이용해 여러 겹 꼬인 말장난을 펼친다.

 

그러니 뜻 충만한 그대, 그대 뜻에 더하시라

내 뜻 하나를, 그대 뜻 더욱 커지도록

다정하지 않은, 아리따운 간청자로 하여금 꺾게 말라

하나만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 한 뜻 안의 나를

 

한 가지의 추동은 성적 호기심을 은유로 사용하여 완전히 낯선 감각 세계에 대한 탐험을 표현하려는 추동이다. 흔한 이미지 하나를 들어 보자면, 신세계를 남성 식민주의자들에게 침투당해 문명을 접하는 여성으로 그리는 것이 그러한 예다. 존 던은 성교에 관한 시 한가운데서 그의 정부를 아래와 같이 일컫는다.

 

오 나의 아메리카여, 나의 새로 찾은 땅이여,

나의 왕국이여, 한 남자가 살아야 가장 안전한 곳.

나의 보석 광산이여, 나의 제국이여.

그대를 발견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또 다른 추동은 공포감이 호기심을 압도할 때 솟아나는 것으로 남성의 힘을 강조하려는 추동이다. 특히 전쟁의 심리학은 실제 전쟁 중이 아닐 때라면 그 덕분에 오히려 성 심리나 연애 심리에 더 부담 없이 갖다붙일 수 있다.

 

남성 오르가슴과 조루는 옛날부터 있었다. 그렇지만 Imperfect Enjoyment 와 같은 시들 이전에는 그것이 자의식적인 문화적 사건이 아니었다. 한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였든, 아직 젠더 차이와 남성의 자기규정, 성적인 '수행' 이라는 개념과 맞물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 유혹을 담은 다른 시들, 현재의 쾌락을 즐기라고 부추기는 17세기 시들에는 나이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소모할 것이므로 그전에 당장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신감에 찬 남성 화자가 나온다. 한편 성교 후의 역겨움을 다룬 시들은 이런 시들의 대척점에 서 있지만, 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남자만의 고유한 소유물이라고 상정한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로체스터의 이 시는, 문화적으로는 성적인 행동 표준에 변화가 일어난 순간, 남성 오르가슴에 통제력의 상실, 성적인 무능함이 따라붙는다는 깨달음의 문턱에 서 있다. 과거의 여성 혐오가 정치적, 신학적, 보수주의자들의 것이었다면, 당시의 다른 남성들은 여성의 성적인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깨어나는 데 분명치는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여했다. 성교를 평가하는 기준은 이제 후손을 낳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여성의 쾌락욕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가 된다. 아레스가 아프로디테와의 잠자리를 위해 갑주를 내려놓았듯 예전에는 전사라는 사회적 역할을 게을리하면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되었지만, 이제는 침투하고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그 원인이 된다.

 

이전에는 성교로 인해 자아가 매몰될지 모른다는 공포감 (작은 죽음) 이 있었다면, 그로부터 한 세기쯤 지난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대에는 그 공허가 초월로 바뀌고, 시인들은 그 초월을 향한 열망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로체스터의 시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남성 섹슈얼리티가 음경에 놓인 것이 역사적인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리고 나아가 그 과정이, 여성 섹슈얼리티를 남성 섹슈얼리티와 구분되는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으레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인간 본성의 수많은 양상들은 실상 이전에는 지배적이었던 관점들이 당대의 조건과 어긋나는 역사적 변화를 거쳐 왔는데, 남성성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역사에서 로체스터의 시는, 이전에는 적어도 어느 한 계급의 소유이거나 '타고난' 전형으로 간주되던 남성성이, 군사적 승리와 성적인 정복을 뽐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공허한 행위로 변해 버리는 위기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로체스터 식 남성은 낡은 남성적 방식에 기댔다가 힘과 통제력을 잃었으니 그 결과 응당 여성과 새로이 연대를 맺어야 할 것 같지만, 로체스터는 그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모든 남성의 여성과의 성교는 시련이고, 거기서 남자는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매시지를 내포하는데, 그 이유는 여자들에게 사실 남자는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공포가 남자 안에 너무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로체스터는 [시뇨르 딜도] 라는 한층 조롱조의 시에서 궁정 숙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죽 코트' 를 입은 '고귀한 이탈리아인' 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다. 로체스터는 음경의 대체물로 이름 높은 시뇨르 딜도가 남자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며, 여자가 남자한테서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그것뿐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우리 고상하신 마나님들의 특기는

어릿광대들의 프릭에 홀랑 넘어가기

딜도 씨의 분별과 정력을 마님들이 아시는 날엔

맵시꾼들은 홀딱 망할걸

 

시뇨르 딜도는 마침내 분노한 '프릭 떼' 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지만 프릭들은 고환이 달려 있어서 몸이 둔하기 때문에 딜도를 마을 밖까지 쫓아가지는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훈은 명확하다. 여성들더러 택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시뇨르 딜도를 택하리라는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에 아내의 정숙을 시험한 많은 남자들의 이야기 (초서의 [법률가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 돈키호테의 한 장인 [분별없는 호기심] 등) 와 마찬가지로, '시뇨르 딜도'는 여자들이 남자들의 성적 봉사를 불만스러워 하거나 필요 없어할지도 모른다는 남성의 공포를 다룬다. 차이가 있다면 '시뇨르 딜도'는 다른 남자의 성적 유혹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남성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리라는 예언을 외쳤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적인 힘과 공적인 힘이 곧 성 능력과 등가로 여겨지는, 젠더 전쟁에 대한 자라나는 인식은 그저 로체스터라는 한 17세기 영국 시인이 처음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그 공식을 가장 뚜렷하게 제시했을 뿐이다. '즐거운 군주the Merry Monarch' 로 알려진 찰스 2세의 전반적인 통치 스타일과 궁정의 낭비벽, 그리고 그의 수많은 정부들은 실제 권력과 성행위 사이의 직접적 관계, 그리고 더러는 서로의 치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예다.

 

영국 내란 기간에 나돈 수많은 선전 책자들을 보면 그런 주제들이 전쟁 때문에 한층 정치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선전 책자들은, 프랑스로 도피한 왕정주의자들은 긴 머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나약한 자들이며, 그들이 바다 건너에 있는 동안 그 아내들은 분명히 힘 좋고 정치관도 똑바로 박힌 의회당원들로부터 적절한 성적 봉사를 받을 거라고 장담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17세기 내내, 오쟁이 진 남편, 곧 남자 망신을 시켰다는 이유로 주인공에게 혼나고 청중에게는 조롱당하는 어리석은 정인이나 남편이 희극의 주요 재료가 되었다. 1670년대에는 윌리엄 위철리가 희곡인 [시골 아낙네]에서 그 농담을 역이용하는데, 주인공은 발기불능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남편들을 방심하게 만들어 수두룩한 지체 높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

 

각각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의 탄원' 과 '남성의 응답' 이라는 제목이 붙은 선전 책자 두 권을 보면, 역시 1670년대에 일어난, 한층 흥미로운 성과 정치학의 연쇄 사건이 보인다. 카페들은 찻집과 초콜릿 집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현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딱 알맞게 무르익어 있었다. '… 여성의 탄원' 은 근본적으로 카페들이 "전 기독교인 가운데 가장 능력 있는 행위자로 인정할 만한" 영국 남자들의 성적인 잠재력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했다. 커피가 남자들의 액즙을 고갈시키는 바람에 남자들은 '세우지도 못하고, 단 1회 출격에 넙죽 업드러진다… 소집을 당했는데 탄약이 없는 젊은 민병대처럼, 그들은 행위를 할 수 없으며' 화력도 없어 '불꽃만 튀기고 꺼진다' 한편 '남성 능력에 대한 오명을 벗기는 것'을 목표로 발표된 '남성의 응답' 에서는 커피란 원래 터키산이며 '터키 사람들이야말로 그 방면으로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고 정열적이라고 자처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 라고 주장한다. 커피는 남성의 정수를 고갈시키기는커녕

 

발기를 더욱 왕성하게, 사정을 더욱 충만하게 만들며, 정자에 영적인 정수를 더해주어 단단하게 만들고 자궁의 입맛에도 더 잘 맞게 하며 여성인 정인의 분투와 기대에도 값하게 만든다

 

찰스 2세는 오랫동안 카페의 확산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 까닭은 카페가 선동, 또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야당의 거점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탄원' 은 그런 두려움을 아예 무시했다. 카페의 남성들은 말하자면 여성처럼, "너무 온순하고 너무 말만 많아졌기" 때문에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찰스 2세는 1675년에 가서 마침내 카페 탄압에 나서긴 했지만 반발이 극에 달하는 바람에 11일 만에 포고령을 백지화했다. 발기불능과 유약함에 대한 비난은 문화적 정치적 분위기의 일부여서 어느 측에서든 입맛대로 가져다 쓸 수 있었다. 그 후 17세기 후반 내내 각 정당들은 상대를 논박하기 위해 툭하면 이 화두를 이용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남성 발기불능과 부적절한 성적 수행을 묻는 이 모든 논의들이 새로운 압박을 가해 왔다 하더라도, 우리는 로체스터의 정인이 던진 물음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는 쾌락에도 빚을 갚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말로 하자면, 이성 관의 관계는 군사적 모형을 바탕으로 한 전투인가, 아니면 쾌락과 즐거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모인가, 그도 아니면 프랑스인들이 향유 jouissance 라고 부르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선 성애인가? 자유사상가의 성 철학 뒤에는 자연적인 것에 대한 몰두가 존재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우주의 중심에서 남자를 밀어내고 여성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과의 연대를 강조한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아담이 한 말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천사 라파엘이 아담에게 이브에 대한 육체적 사랑은 단순히 접촉으로 인한 즐거움일 뿐이라고, 그것이 가축에도 짐승에게도 허용되었음을 생각하라" 고 말하면서 기를 꺾으려 하자 아담은 이브에 대한 육체적 느낌은 감정적 영적 "조화"와 엮였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히려 "하늘의 영은 사랑하지 않는지,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라고 물어 라파엘은 난처하게 한다. 라파엘은 얼굴을 붉히며 자기들은 "공기와 공기보다 쉽게… 순수와 순수의 욕망은 결합하여" 완전히 섞여 있기 때문에 접촉은 천사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라파엘은 서둘러 작별 인사를 고한다. 인간들과 천사들 간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천사들은 한 장으로 된 천상의 직물에서 잘려 나온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두 육체로부터 나온 영혼을 하나로 합치려면, 살과 뼈로 서로 격리된 두 분극에 쾌락과 사랑의 조화로 다리를 놓아야 한다.

 

                              -  Leo Braudy "Performance Anxiety"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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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거의 절반 이상의 인구가, 여성의 출산율이 자연 인구 유지를 위한 최소 수치인 2.1을 밑도는 국가에 살고 있다. 이는 멜버른과 모스크바, 상파울로 그리고 서울, 테헤란, 도쿄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는 서구나 부유한 국가들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아르메니아, 부탄, 엘살바도르, 폴란드, 카타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57년에 4에 가까운 절정을 이루었던 미국의 출산율은 이제 2를 간신히 넘는 정도인데 다른 부유한 국가인 독일이나 일본 등과 비교하면 단연 높은 수준이다. 인건비가 저렴한 브라질, 러시아, 이란 및 남 인도와 같은 개도국들에서도 출산율은 1980년 이후로 꾸준히 하락하는 추세다. 중국의 노동인구는 지난 35년간의 경제적 기적 이후로 2012년 피크를 찍고 감소하고 있으며, 통치지도자들에게 중국이 부유해지기 전에 늙어버릴 것이라는 공포를 안겨주고 있다.

 

매우 높은 출산율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으나 사하라 이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니제르, 말리, 소말리아, 우간다 그리고 부르키나파소 등 5개국이 6이상의 출산율을 기록했다. 5 이상의 국가는 18개국에 이른다. 이라크 요르단 필리핀 과테말라 등의 예외를 제외하면 사하라 이남 지대가 출산율이 3~4에 이르는 국가들을 이룬다. 파키스탄, 이집트, 아이티, 온두라스 및 볼리비아의 출산율은 3을 약간 밑돈다.

 

이것은 서구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그리고 경고의 알람으로 때로는 히스테리 증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식으로 다가왔다. Jonathan V. Last, 는 그의 책 "What to Expect When No One's Expecting,"에서 '다가올 인구 재앙'을 '미국의 baby bust'로 표현했다. 국립 국방대학교의 Steven Philip Kramer 교수는 '출산 갭'을 줄이고 적은 노동자가 많은 은퇴자를 부양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출산 촉진' 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지한 이코노미스트지마저도 '사라져가는 일본인' 에 대한 경고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어두운 예언은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며,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고 결국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았다. 시어도어 루스젤트는 1934년 "Twilight of Parenthood" 와 같은 책에서 대공황시기에 앵글로색슨들이 "인종적 자살"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이는 서구 세계의 상상을 사로잡았다.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서구의 베이비 붐 추세 이후로 재앙의 합창은 다시 부활했는데, Paul R Ehrlich 의 1968년 책 "The Population Bomb" 에서는 식량의 생산을 압도하는 인구 증가가 전지구적인 재난적 맬더스트랩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들이 팔려나갔다. 이런 공포의 행진은 지치지도 않아서, "The Birth Dearth" (1987) 이나 "The Empty Cradle" (2004) 같은 제목의 책들은 꾸준히 반복해서 서점에 나타나곤 했다.

 

왜 시람들은 이런 전세계적 트렌드를 집단 자살과 같은 표현을 써 가면서 재앙으로 다루는 것일까? 이는 인구 감소가 국가적, 군사적, 경제적 파워의 저하를 발기부전처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Margaret Artwood 의 1985년 디스토피아 고전 The Handmaid's Tale 이나, P. D. James 의 소설에 기반한 멕시코 감독 Alfonso Cuaron 의 2006년 영화 "Children of Men" 등에서 이런 근심들이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 느려진 인구 증가는 인류의 번성에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기후 변화와 끝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 핵 위험의 시대에, 인구의 규모가 곧 힘이라는 역사 속의 공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출산율의 저하는 부의 성장이나 세속주의의 기능이 아니며, 이는 전세계적인 것이다.




 

총 출산율이 2.1 이하로 떨어졌을 때조차도 과거 인구 증가의 '모멘텀'은 그대로 남아 인구를 수십년 간 증가시켰다. 인구 총수가 감소하는 시기가 닥치더라도 이 추세는 곧 사라져 전체 추세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는 급격한 출산율 감소를 경험했고 이는 높은 성인 남성 사망률과 맞물려 (이는 음주 성향과 깊은 관계가 있다) 널리 알려진, 러시아 인구의 지속적 감소를 가져왔다. 출산율은 이후 1.6 수준으로 반등했고, 음주 관련 규제의 도입으로 노동인구 감소율도 둔화되었다.

 

절망적으로 가난하지는 않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임기 여성들은 연적으로 아이를 갖는 부담과 대가를 비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젊은 여성은 특히, 물론 젊은 남성들마저도, 높은 이혼율과 더욱 오래 사는 고령의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결혼과 육아를 중요한 리스크로 보고 있다. 이 리스크를 준비하고 부담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출산을 하게 되는 20~35세 사이의 청년들에게 가장 큰 짐이다. 브라질, 이탈리아, 터키 그리고 미국에서 청년들은 더 높은 교육과 그로 인한 더 많은 교육 채무를 요구하는 커리어를 준비해야 한다. 대학 수준의 학위를 지니더라도 고용은 불확실하고 커리어패스는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다.

 

동시에, 맞벌이는 갈수록 핵심이 되어 가고 있다. 부유한 국가와 빈곤한 국가를 가릴 것 없이 소득은 위태로워지고 있다. 높은 주택 가격과 임대료, 모기지론의 높은 장벽은 갈수록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 낼 동력을 제한하고 있다.

 

빠르게 감소하는 출산율은 끊임없는 근심걱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첫째, 전술한 대로 출산율의 감소는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여성들에게 기회를 준다. 결혼의 연기와 출산을 2명 이하로 줄이는 추세는 개발도상국에서도 일반적이며, 이는 젊은 여성의 교육 수준 증가와 커리어의 개선과 연관되어 있다. 출산 저하를 걱정하는 것이 거의 남자들뿐이라는 점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둘째로 중간 수준의 노동력은 저출산사회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이 1970년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이 인도를 압도한 원인 중 하나이다. 남인도 특히 Kerala 주에서도 상당한 출산율 감소는 두드러지는 경제와 교육 성과로 되돌아왔다. 당연히, 어린아이들은 서비스업과 농업 및 산업에서의 육체노동 모두에서 숙련된 청장년노동자만큼의 생산성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초교육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 줄어들수록 고급 교육에 더 자원이 집중될 수 있다. 비록 중국의 경기 성장이 초기에는 농촌 지역의 수많은 저임금 이민자 유입에 힘입은 적도 있지만, 이 나라는 인력의 양이 아니라 곧 고급 교육을 받은 고급인력의 질이 떠받치는 경제체제로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셋째, 젊은이들의 고용과 커리어 경험을 강화함으로써 저출산은 사회적 정치적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고출산율 사회는 생산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을 양산하게 마련이고, 전문가들은 이들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의 봄과 테러리즘에 기여하는 'youthquake' 현상을 일으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출산율이 감소하기 시작한 이후 20~30년 후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청년들은 더 이상 노동시장의 과잉공급이 아니게 된다. 고용주들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 가치가 높아짐으로써 이에 따라 경제적 직업적 전망도 개선되고, 그로 인해 결혼과 가정 형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는 한 세기 이상 세계 최대 경제 체제인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젊은 노동자들은 심각한 고용과 커리어 문제에 직면해 있고 이는 나이든 노동자들이 그들의 직업을 틀어쥐고 있는 현상에서 일부 기인한다. 지난 10년 간 노동참여율은 고령층에서 더욱 높아졌고, 이는 고령노동자들의 건강과 생산성 향상,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의 감소와 서비스업의 증가, 그리고 파괴적인 금융위기가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계획에 미친 충격 등과 관계가 있다. 아무도 지난 6년간의 추세로부터 미래를 전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낮은 출산율은 해당 국가의 정부들이 자국의 청년들을 외국으로 내보내 직업을 찾게 하고 돈만 송금하게 하고 자국내에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위험을 줄이는 따위의 인구 유출 정책을 쓰게 할 유인을 낮춘다.

 

이러한 정책들은 때로는 명백하고 때로는 암시적으로 실제적 양가감정과 결함한 상태로 멕시코, 필리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그리고 인디아에서, 사하라 이남 지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해외 이민이 필수적인 삶의 길이 되는 방식은 한계가 분명하다.

 

다른 수많은 사회적 변동이 그러하듯 저출산의 확대는 수많은 도전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겨준다. 이에 적응하지 못한 정치 체제는 골치아픈 재정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후한 공공연금제도를 갖춘 유럽은 청년 취직자들의 감소와 기대여명의 증가로 인해 큰 불안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시스템 유지를 위해 빠른 정년과 높은 '연금 지불 비율'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저출산 추세는 조정될 수 있고, 역전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스웨덴과 프랑스 같은 일부 국가들이 이미 경험했던 추세이다. 전후 스웨덴은 1970년대와 1990년대에 1.6 수준의 낮은 출산율을 기록했지만, 이는 아마도 다양한 육아지원시스템 덕분에, 1.9 수준으로 반등했다. 프랑스는 아이를 가진 젊은 가족에 장기적인 공공 지원책을 마련했고 출산율은 스웨덴 수준으로 낮아지지 않았다. 다른 국가들은 맞벌이 부모를 지원하기 위해 반나절을 교육하고 일찍 마치는 전통적인 학교 일정 제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이러한 경험들은 일각이 주장하듯 저출산 문제가 멸망으로 치닫는 '죽음의 나선' 과 같이 호들갑을 떨 공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세계 경제는 여전히 취약하고, 노령 사회라는 불길한 전망이 여전히 안전한 추정이긴 하지만, 인구 감소는 어찌되었건 반복되는 하나의 유행이기도 하다. 수많은 다른 유행처럼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인본주의는 대처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많다. 저출산은 그 중의 하나가 아니다.

   

 

By MICHAEL S. TEITELBAUM and JAY M. WINTERAPRIL 4, 2014

 

Posted by 김구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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